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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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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동문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부산광역시 금정구역사관광

금정산성 동문

금정산성 네 개 문루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전망이 뛰어난 동문은 금정산 주능선의 해발 415m의 고개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민들이 가장 근접하기 쉬운 편이라 금정산성의 으뜸 관문으로 자리하고 있다. 금정산성 부설비의 기록에 의하면 1807년 늦가을에 토목공사를 일으켜 한 달 만에 동문이 완성되었다고 전해진다. 동문은 홍예식문[虹霓式門]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단층 문루이다. 금정산성 동문의 창건 유래를 보면, 동래부사 정현덕이 동문과 서문의 재건에 힘쓰고 있을 때의 이야기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래부사는 두 성문을 아주 완벽하게 세우기 위해 이름난 석공을 수소문한 끝에 사제지간인 두 석공을 찾아 스승에게는 동문을, 제자에게는 서문을 짓게 하였다. 동문을 맡은 스승은 야욕과 욕심이 많아 웅대하게만 짓고자 하였으나 서문을 맡은 제자는 기술이 앞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살려 스승보다 먼저 짓게 되었다고 한다. 스승은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기술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이들 사제는 동문과 서문 공사가 끝난 뒤에는 힘을 합쳐 밀양 영남루 공사를 하였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금정사(김포)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경기도 김포시역사관광

금정사(김포)

금정사는 신라 진흥왕(540~576) 때 창건되었으며, 창건 당시에는 ‘고상사’라고만 전하여 왔으나 달리 전해오는 기록은 없다. 조선 인조 5년(1627)에 왕은 자신의 아버지 원종으로 추증하고 어머니 역시 인헌왕후로 추증하여 그들의 묘를 양주에서 김포로 이장하고 장릉이라고 하였다. 인근에 있던 고상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장릉을 보호하는 사찰로 재건하면서 ‘봉릉사’라 칭하게 되었다. 1930년에 당시 주지 영송화상이 사찰을 중수하였고, 1938년 주시 성화대사가 다시 한번 크게 중수하였다. 6·25전쟁 이후 사찰을 정녕스님과 고근스님이 대웅전과 범종각을 새로 지었다. 또한 능을 지킨다는 봉릉사에서 절의 뒷산인 금정산과 법당 앞에서 좋은 물맛이 솟아나므로 ‘하늘우물’이라는 의미의 ‘금정사’로 개명하여 김포지역 포교와 수행도량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금정사는 경기도 전통사찰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기도 김포시 승가로 125 (풍무동)
금용암(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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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역사관광

금용암(부산)

금용암은 쇠미산의 작은 암자로, 입구의 송림길과 함께 불국 수미산 산속에 홀로 묻힌 듯 자연과 동화되어 있는 사찰이다. 금용(金蓉)이란 금색 연꽃이란 뜻으로, 불교사상에서 연꽃과 금강석 또는 금과 함께 대표적인 불교사상의 상징을 따서 사찰명을 지었다. 조선 후기 철종 때 이인덕행이라는 보살이 1919년 10월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대봉이라는 법명을 받아 쇠미산 기슭에 기와집으로 인법당 3칸을 짓고 금용암이라 불렀다. 금용암이라는 이름은 쇠미산의 별칭인 금용산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금당인 염화전과 삼성각, 요사인 원통료·향적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992년 지은 염화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태이며, 안에는 석가여래 좌상을 중심으로 약사여래 좌상과 관음보살 좌상이 배치되어 있고, 뒤편에는 1993년 조성한 후불탱을 비롯하여 지장탱·신중탱이 있다. 삼성각 안에는 삼신할머니 탱화가 있는데, 불상이 아니라 여인 세 명을 그린 것이다. 이곳 삼신할머니는 오래전부터 득남을 기원하는 이들에게 영험이 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절 담벽 아래 비탈길에 대봉의 상반신이 선각된 사적비가 있다.

부산광역시 연제구 성지곡로 111
금수사(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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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역사관광

금수사(부산)

금수사는 구봉산 아래 자리한 아담한 사찰이다. 금수사 계단 앞으로는 산복도로가 잘 나있으며, 버스정류장이 바로 앞이라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좋은 도심 속 사찰로 알려져 있다. 금수사는 한국불교원효종의 총본산으로도 유명하다. 2003년 입적한 원효종 종정 법홍스님이 주석한 이곳에는 원효대사의 유지와 종풍을 받들고자 하는 수많은 사부대중의 귀의처로서 자리매김하였으니 산중이 아닌 일반 백성들 속에 중생들을 깨우쳐 주고자 했던 원효대사의 화쟁 무애사상이 빛나는 사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불교가 낳은 불멸의 성사 원효대사의 유지를 받들고, 호국일념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사명대사의 족적이 남아 있는 곳, 구계산 금수사는 이러한 역사적 터전 위에 지금 불법홍포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있다. 또한 금수사 경내에 호국영각을 짓고 기미년 독립선언의 민족대표 33인과 안중근, 김좌진, 안창호, 윤봉길 등 애국독립지사 22인의 위패를 모셔 매년 추모법회를 봉행하고 있으니 호국도량으로서의 그 위상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부산광역시 동구 망양로 533-1
금선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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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역사관광

금선사(서울)

금선사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솔 내음이 가득한 아름다운 사찰이다. 청와대와 경복궁이 위치한 인왕산이 바로 보이는 종로구 구기동에 소재하고 있다. 이북5도청을 지나서 북한산국립공원 비봉코스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첫 번째 관문인 삼각산 금선사의 일주문을 만나게 된다. 도량의 전각은, 법회를 보는 반야전을 지나면 200년이 넘은 소나무가 중앙에 있으며, 소나무를 지나서 108계단을 오르면 금선사의 주불이 모셔진 대적광전이 사찰의 가장 중심부이면서 가장 높은 곳에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우측으로는 삼성각이 있고, 북한산의 일급수가 모였다가 흘러내리는 홍예교가 자리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비봉길 137
금곡사(강진)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1유형
광주·전남 강진군역사관광

금곡사(강진)

금곡사는 신라 말 밀봉대사가 창건하여 성문사라 칭하다가 이 주위에 금광이 있다 하여 후에 금곡사라 개칭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훈련 장소로 쓰였으나 왜구의 침략으로 불에 탔다. 이후 폐사와 중창을 반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찰 옆 개울가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이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금광이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금곡사에는 백제 계통의 고려 양식인 보물 제829호 삼층석탑이 있는데 1985년 복원작업을 하던 중 석가세존 진신사리 32과가 발견되어 세상의 이목을 받기도 했다. 이 탑은 석탑으로서는 5m가 넘는 거탑으로 그 형식 면에서는 전형적인 고려 양식을 고수하면서도 기단부 구성이나 옥개석의 우동마루 등 일부에서는 약간의 백제 계 석탑의 분위기가 가미되어 있다. 조성 연대는 고려 초반기로 추정된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의 양이 일정한 약수터에서 풀로 만든 대롱으로 물을 빨아먹으면 신경통이 사라진다는 전설이 있기도 하다. 아마도 임진왜란 때 왜구를 격파한 이 고장 출신 김억추장군의 전설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매년 봄이 되면 금곡사로 가는 군동면 호계리에서 작천면 군자리에 이르는 19㎞ 구간은 연분홍빛 벚꽃터널이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금곡사 벚꽃 길은 1992년부터 2년에 걸쳐 강진군 공무원들이 휴일을 반납해가며 직접 만든 곳이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강진군 군동면 까치내로 261-21
금강암(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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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보령시역사관광

금강암(보령)

금강암(金剛庵)은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에 있는 높이 411.8m 양각산(羊角山)의 동편 중턱에 자리 잡은 사찰이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사찰 이름이 ‘옥계사(玉溪寺)’로 나와 있으며, 1799년(정조 23)에 간행된 '범우고(梵宇攷)'와 1930년대에 이병연(李秉延)이 찬술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옥계사’라는 이름을 기록한 뒤에 지금은 '금강암'이라 칭한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조선 후기에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활약한 박문수(朴文秀)의 할아버지 박선(朴銑)이 자주 찾았다고 하는 설도 전해진다. 비문(碑文)에 의하면 금강암을 창건한 영암은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제자이며, 영암이 금강암을 창건한 이유는 태종의 후비였던 궁주 권 씨(宮主 權氏)의 소원을 빌기 위해 원당(願堂)으로 창건한 것이다. 궁주 권 씨의 아버지인 영가군(永嘉君) 권홍(權弘)과 궁주 권 씨의 딸인 옹주 이 씨(翁主 李氏)가 후원하였다.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보령호로 1139-102
극락암(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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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역사관광

극락암(강원)

극락암은 간성 대대리 검문소에서 진부령 방향으로 약 2키로 정도가면 우측에 이정표가 있다. 이 이정표에서 마을 안길을 통하여 산모퉁이 숲길을 지나면 어머니 품속을 연상케하는 아담하고 정겨운 사찰이 고즈넉이 노송숲속에 자리하고 있다. 예전 극락암은 건봉사에서 서북쪽으로 2키로 지점에 있었으며,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였다. 945년 묘적동에 창건하였으며 1878년 산불로 인해 건봉사와 함께 소실되었으나 다음 해에 증건하였다. 일제때까지 산신각 1칸을 포함하여 총49칸으로 건봉사와 산내암자 5개중 가장 큰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50여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함께 생활하던 수행처이자 봉명학교에 다니는 멀리서 유학온 여학생들의 기숙사로도 사용했다. 예전 그곳은 현재 민통선 내라서 출입이 불가능하고 건봉사 대웅전뒤 서북쪽 능선넘어 1키로미터 지점에 터만 남아있다. 예전엔 건봉사에서 암자까지 우마차가 다닐 정도 길이나 있었다. 해방 후 38선 이북에 위치하여 정상적인 종교 활동이 불가능하자 극락암 비구니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극락암에 살았던 비구니 법선스님이 1956년 간성면 광산3리에 극락암을 신축하였다가 1962년 현재의 간성읍 교동리 280번지 함박동으로 이전하여 오늘의 극락암이 되었다. (출처 : 고성군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교동2길 26 대한불교조계종극락암
귀정사(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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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역사관광

귀정사(남원)

귀정사는 백제 무녕왕 15년(515년)에 현오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본래는 만행사(萬行寺)라 불렸다. 이후에 백제의 왕이 절에 참배를 와서 고승(高僧)의 설법에 탄복하여 3일간 절에 머무르며 국정을 살피고 돌아갔다 하여 귀정사(歸政寺)라 고쳐 불렀다. 왕은 “죽고 살기를 스님과 더불어 같이 한다”는 글귀를 남겼다고 한다. 1221년 대방(남원의 옛 이름) 태수 복장한(卜章漢)의 요청으로 귀정사에 제2의 백련결사를 개설했다. 고려 목종 5년(1002년) 대은스님이 크게 중창하였고, 조선 세조 14년(1468년)에 낙은스님이 각각 두 차례에 걸쳐 크게 중창하였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모두 소실됐다. 현종 5년(1664년) 설제대사가 비교적 옛 모습대로 고쳐졌고, 순조 4년(1804년)에 현일대사가 다시 보수하였으나, 우리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 와중에 옛 건물이 모두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옛 귀정사에는 법당, 정루, 만월당, 승당, 연화당, 삼광전, 문수전, 명월당, 시왕전, 향로전, 영당의 전각이 있었으며, 부속 암자로는 남암, 상암, 대은암, 낙은암 등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귀정사에 살던 스님들이 모두 흩어지자 만공스님이 큰 법당에 모셔졌던 삼존불상을 충청도 수덕사 대웅전으로 옮겼고, 지금도 그곳에 모셔져 있다. 1968년 유정동 스님이 보광전, 승당, 요사채를 복원하였다. 2006년부터는 새로운 대승불교운동인 인드라망생명공동체 활동의 터전이 되면서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보광전 개축, 만행당, 관음전, 산신각, 종각 등을 새로 건립하였고, 인드라망 수련원, 만행산 귀농학교, 숲살림원, 사회연대 쉼터 인드라망 등이 운영되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산동면 대상2길 246
극락암(양산)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경상남도 양산시역사관광

극락암(양산)

양산 극락암은 통도사의 여러 말사 중 하나이다. 통도사에서 서북쪽으로 1.5㎞ 떨어진 산속 암자이다. 고려 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영조 때 철홍대사가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1968년 이후 가람 전체를 경봉선사가 중건, 중수하였다. 풍수지리상으로 입지를 보면 연꽃이 물 위로 올라온 모양인 연화도수형의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한강 이남의 제일가는 호국 선원이며 하안거와 동안거 도중에 일주일간 한숨도 자지 않고 깨어있는 용맹 정신이 끝나면 쉬지 않고 그 길로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것이 이곳의 전통이다. 극락암 안에 있는 극락영지와 홍교는 통도사 8경 중의 한 곳으로 경봉 스님이 71세에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극락으로 가는 다리의 의미로 만들었다고 한다. 사계절 다 좋지만 봄에 피는 벚꽃이 유난히 아름다워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로 108
김택준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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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역사관광

김택준가옥

김택준가옥은 야산을 뒤로하고 있는 이 집은 마을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집을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약 200년 정도 되었다고 하며, 현재 경주 김 씨의 후손이 살고 있다. 전체적으로 H자 모양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겹집으로, 안채와 사랑채·부속건물로 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집이고, 부속채는 사람 인(人) 자 모양의 단순한 맞배지붕집이다. 안채는 6개의 방이 겹쳐서 배치되었고, 그 오른쪽으로 샛방을 만들어 사랑채와 연결하고 있다. 사랑채 2칸은 외부에 툇마루를 놓아 연결통로로 활용하고 있다. 안채의 왼쪽에는 부엌이 있고, 그 앞쪽으로 곳간과 외양간을 덧붙였다. 부엌과 덧붙어 있는 방은 사당으로, 위패가 모셔져 있다. 마당의 왼쪽에는 옛날에 사용하던 우물이 남아있고, 뒤쪽에는 야산을 파고 돌로 벽을 만든 약 0.5평 정도의 냉장굴이 있다. 마당에는 두 개의 출입구가 있는데, 남녀가 따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출처 : 국가유산청)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남면 창리길 4
김환기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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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 신안군역사관광

김환기고택

한국의 대표적 서양화가로 우리나라 전통미를 현대화시키는데 주력한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 화백이 태어난 곳으로 현재 안채와 화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환기는 우리나라 모더니즘의 제1세대 화가로 한국의 고전적 소재를 추상적 조형언어로 양식화하여 한국미술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인물로, 이 곳은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 작품활동이 이루어졌던 공간이라는 역사적, 예술적 가치와 함께 20세기 초반 전통가옥이 근대로 들어서면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실용적으로 변용되어 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신안군 안좌면 김환기길 38-1
김성래 가옥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역사관광

김성래 가옥

김해 김씨 17대 손이 살고 있는 가옥으로 현 소유자의 14대 조부가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본래 초가였던 것을 60년전 기와로 바꿨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되어 있는데 안채는 양양지방에 남아있는 북방계통의 집이다. 왼쪽으로 넓은 부엌을 배치하고 오른쪽으로 가운데를 갈라 나눈 뒤, 다시 구획하여 6개의 작은 방을 만들었다. 부엌 앞으로 내밀어 지은 외양간은 창고로 개조하였다. 사랑채는 나중에 늘려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안채와 달리 큰 방 셋을 마련하고 밖으로 툇마루를 두어 방과 방이 서로 연결되도록 하였다. 대문은 전형적인 솟을대문으로 대문의 왼쪽에 마구간과 광이 있다. 출입로 오른쪽에 연꽃이 있는 방지가 있어 사랑채 앞쪽 지붕선과 함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남면 북분안길 106-9
김정묘역 문인석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역사관광

김정묘역 문인석

김정묘역 문인석은 고려시대의 문신인 김정 선생의 묘역에 있는 1쌍의 문인석이다. 김정 선생은 고려 공민왕 때 양광도 찰방사와 전라도 찰방사, 대호군을 역임하였으며, 고려 후기 신돈의 개혁정치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축출되자 유배되었고 그 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광주목지에 중대광 광성군에 봉하여졌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 문인석은 총 2기로 동일한 수법을 사용하여 조각하였고, 재질은 화강암이다. 문인석이 높이 121cm, 오른쪽 문인석은 높이 123.5cm로 두 기의 크기가 서로 다르며, 다른 문인석들에 비해 규모가 작다. 머리에는 장식이 없는 낮은 관모를 쓰고, 눈, 코, 입은 얇은 선으로 표현하였으며, 두 손에는 신하들이 임금을 뵐 때 손에 쥐던 홀을 들고 있다. 묘역에는 문인석 이외에도 망주석 1쌍과 선생의 묘비가 마련되어 있는데, 문인석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최근에 세운 것이다.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칠전동 619-2
김청풍부원군묘역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역사관광

김청풍부원군묘역

영의정 김육의 아들이며, 조선 18대 임금인 현종의 장인이자 현종의 아내 명성왕후의 아버지인 충익공 김우명의 묘역이다. 충익공 김우명은 인조 20년(1642) 진사시에 합격하여 강릉 참봉, 세마, 영돈녕부사, 오위도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김우명이 사망하자 조정에서 부원군의 대접을 하기 위하여 강원특별자치도 춘성군 신동면 증리에 묘소를 하사하였다 한다. 시신을 배에 싣고 한강을 거슬러 가던 중 현재의 묘소 앞의 강에 이르렀을 때 배가 움직이지 않고 돌풍에 명정(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산으로 날아갔다. 명정이 날아간 곳으로 가보니 그곳이 명당이어서 하사한 땅을 취소하고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묘역에는 외손이 되는 숙종의 친필 묘비가 있고,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는 호조판서를 역임한 이민서가 짓고 윤심이 글씨를 썼고, 전서는 서포 김만중의 솜씨이다. 그 옆으로 망주석, 문인석 한 쌍식과 석등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또한 강원특별자치도 내에 있는 왕릉 이외의 묘지에는 담장이 없는데, 이 묘소는 유일하게 둥근돌(월석)이 박힌 묘담장이 둘러져 있는 것이 특색이다.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서면 경춘로 667-9
금강정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역사관광

금강정

1428년 김복항이 금강정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영월제영’에 의하면 이자삼이 군수로 있을 때 금강의 아름다움을 보고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자 안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인 ‘금강정’ 현판이 걸려 있다. 금강정 아래로 푸른 동강이 흐르고 있는 이곳에서 영화 ‘라디오 스타’를 촬영했다. 금강정 주위엔 비운의 왕 단종과 관련된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되어 있다. 익공계 양식으로 바닥은 마루를 깔았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모로 단청으로 얹혀있다. 금강정을 계족산과 태화산이 둘러싸 영월 8경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1684년 우암 송시열은 금강정 주위로 펼쳐지는 절경을 바라보며 ‘금강정기’를 썼다. (출처 : 영월군청 문화관광)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금강공원길 136
김종길 가옥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역사관광

김종길 가옥

평지에 ㄱ자형 안채를 배치하고 一자형 사랑채가 있어 전체 평면은 ㄷ자형을 이루고 있는 집이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건넌방과 부엌을 두고 왼쪽에는 웃방·안방·부엌·사랑방을 두었는데 사랑방은 원래 부엌의 광을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웃방과 안방 밖으로 툇마루를 설치하였고 건넌방 앞에서 시작된 ㄱ자형 툇마루는 안방 앞까지 연결되어 있다. 행랑채는 나중에 새로 지은 것인데 대문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헛간, 오른쪽은 넓은 방과 부엌을 두고 있다. 이 집은 조선 순조 27년에 세웠으며 전체 구성 형식은 영서지방 민가 형식을 따르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주천면 고가옥길 27
꺼먹다리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역사관광

꺼먹다리

2004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된 다리로 화천군 간동면에 있다. 화천댐이 준공되면서 1945년에 건설한 다리이다. 나무로 만든 상판에 검은색 타르를 칠해 ‘꺼먹다리’ 라는 이름이 붙었다. 화천수력발전소와 함께 당시의 산업을 엿볼 수 있는 시설물이며 건립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근대 가구식 구조 교량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꺼먹다리는 난간도 없이 일부 침목이 훼손돼 수십 년간 방치되다 최근 2007년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아 재정비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한국전 당시 중동부전선을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교량이었기 때문에 전투도 치열했던 곳 이며, 일제강점기 때에는 소양강과 화천을 모노레일을 이용해 수송물자를 이동하기도 했다.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 화천읍 평화로 685
김화군민 망향탑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1유형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역사관광

김화군민 망향탑

김화군민 망향탑은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에 있는 미수복 지구 김화 군민의 실향민 망향탑이다. 1980년 6월 1일에 건립되었다. 김화군은 광복 직전 9만 5,0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광업이 번창하던 지역이다. 6·25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전쟁 이후 원래 면적의 3분의 2 가량이 북한과 비무장지대(DMZ)에 속하게 되었으며, 현재는 김화군의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철원군 김화읍에 속하여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
금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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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역사관광

금산교회

1908년 전주선 교부의 데이트(Lews Boyd Tate) 선교사가 지은 한옥교회이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의 사기(事記)에 의하면, 처음의 교회는 1905년에 5칸으로 지었으나,190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 금산교회 옆으로 1988년에 새로 지은 교회본당과 사택이 들어서 있다. 건물은 남북방향으로 5칸이며, 여기에서 동쪽으로 2칸을 덧붙여 뒤집힌ㄱ자 형태를 이룬다. 내부는 통칸으로 이루어졌으며, 남북방향 5칸과 동쪽방향 2칸이 만나는 곳에 강단을 설치하여 남쪽으로 남자석, 동쪽으로 여자석을 분리하여 마련하였다. 이는 한국 초기 교회건축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형태로 한국 전통사회의 남녀구분이라는 큰 문제를 ㄱ자형 건물을 지어 남녀가 나뉘어 예배를 보게 함으로써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서양식교회의 특징을 조화롭게 결합시킨 이 교회는 초기 교회건축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건물로, 각 구조물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문화재로 지정·보존하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로 407
김해 양동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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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김해시역사관광

김해 양동리 고분군

김해 양동리 고분군은 기원전 2세기대로부터 기원 5세기대에 걸쳐 형성된 고분군으로서, 발굴조사 결과 다양한 묘제와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가야 국가 형성기로부터 발전기의 역사적 사실을 한눈에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가곡부락 뒷산에 위치해 있으며, 전체규모는 약 3만 평으로 추정되며 김해에서는 가장 큰 규모이다. 이 고분군은 지하에 무덤이 중복된 상태로 조밀하게 설치되어 매우 복잡한 배치상태를 보여준다. 이 유적은 일찍부터 김해지역 중심고분유적의 하나로 주목받은 곳이다. 1984년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 의해 처음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이래 1990∼1996년간 동의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4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목관묘, 목곽묘, 석곽묘, 옹관묘 등 548기의 유구와 토기와 청동기, 철기 등 5,1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확인된 유구는 묘제의 변천과정과 연대 규명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출토된 각종 유물은 시기별 가야문화의 실상과 변화상을 한눈에 보여줄 뿐만 아니라 종래의 연구에서 부족했던 많은 자료를 보완하여 국제성을 띤 가야문화의 세련된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러한 발굴성과를 통하여 가야사회의 문화와 국가·사회적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어 구야국(狗耶國) 또는 본가야(本伽倻)가 활발한 해상활동을 통하여 번성한 해양왕국(海洋王國)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2세기 후반에서 4세기까지가 가야철(伽倻鐵)의 전성기로서 해상활동도 가장 활발하여 외래문물도 해로를 통해 직접 유입되었던 가야시대의 번성기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철생산이 가야발전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사실은 동시에 철시장의 상실로 인한 가치 하락이 가야쇠퇴의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으며, 새롭게 부상한 신라나 백제의 압박으로 점차 쇠망하였다는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 같이 김해양동리고분군은 그 발굴성과를 통해 각 시기별 가야문물의 진수를 보여줄 뿐 아니라 낙동강 하류지역 가야사회의 성장과 그 국가적 성격을 밝히는 귀중한 유적이라 할 것이다.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군위 인각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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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군위군역사관광

군위 인각사지

군위 인각사지는 군위군 화산의 북쪽 기슭 강가 퇴적지대에 자리 잡은 절터이다. 인각사는 선덕여왕 시절 원효가 세운 절이라 한다. 그 뒤 고려 때에 크게 고쳐 지었고, 일연이 충렬왕 10년(1284)부터 5년간 이 절에서 머물며 삼국유사를 지은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인각사는 언제 세워졌는지 문헌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발굴조사 때 대웅전터로 생각되는 건물이 있던 곳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건물터를 확인하여, 신라 후기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지금의 인각사에는 법당과 두 채의 건물이 남아 있으며, 중요문화유산으로 인각사 보각국사 탑과 비(보물)가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대구광역시 군위군 고로면 삼국유사로 250
귤림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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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역사관광

귤림서원

귤림서원은 제사 기능을 가진 충암묘와 교육 기능을 가진 장수당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서원이다. 1578년에 제주판관 조인후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사사된 김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의 적거지에 사묘를 세운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1660년 제주목사 이괴가 장수당을 건립하였고, 1667년에는 제주판관 최진남이 김정의 사묘를 장수당 남쪽인 현재의 오현단 안에 옮겨 짓고, 이를 사로 하고 장수당을 재로 하여 귤림서원이라 현액하였다. 1682년 신경윤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예조정량 안건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으로 사액을 하고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의 4현을 봉향하다가 1696년에 이익태 절제사 때 송시열이 추향됨으로써 5현을 배향하게 되었다.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원되었는데, 1892년 제주 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석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2000년 이후 귤림서원 복원 작업에 들어간 제주시는 학생들이 공부하던 장수당과 협문, 돌담 등을 완성한 데 이어, 2007년 8월 향현사 복원을 마무리 지었다. 조선 시대 유학과 유교 문화의 전당으로 제주 유생들의 지주 역할을 하였던 귤림서원이 복원됨으로써 제주 선현의 정신을 되살리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일동
김해 월봉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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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김해시역사관광

김해 월봉서당

김해 월봉서당은 1917년에 세운 유학 교육 시설이다. 처음에는 현재 관동중학교가 있는 곳에 세웠으나 1917년에 지금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이곳에서 영남 지역 기호학파의 맥을 이어 학생들을 가르친 월헌 이보림 선생을 기리기 위해 사당인 명휘사를 세웠다. 월봉서당은 앞면 다섯 칸, 옆면 두 칸의 규모로 홑처마를 갖추었고 기둥이 직접 보를 받치는 납도리집이다. 넓은 방과 높은 천장 등이 근대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곳에는 조선 후기 유학자인 간재 전우의 초상화, 편지, 연보와 석농 오진영의 편지, 연보, 문집, 강록, 유기 등 891점의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경상남도 김해시 덕정로77번길 11-16 (관동동)
김해 산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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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김해시역사관광

김해 산해정

김해 산해정은 조선 전기 유학자인 남명 조식이 30세부터 45세까지 처가인 김해에 살며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정립하고 제자를 길렀던 곳이다. 남명 조식의 경에 바탕을 둔 정신 수양과 의를 기반으로 한 실천 정신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의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산해정의 ‘산해’는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본다’라는 뜻으로, 학문을 닦아 경지가 높아지면 생각과 마음이 바다와 같이 넓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 광해군 1년(1609)에 강당과 사당을 갖춘 ‘신산서원’이 이곳에 창건되었으나 고종 8년(1871)에 서원 철폐 정책으로 철거되었다, 이후 1890년에 산해정이 다시 세워졌고, 1999년에는 사당인 숭도사가 복원되었다. 숭도사에는 남명 조식의 위패와 더불어 그와 교류했던 송계 신계성의 위패도 모시고 있다. 산해정은 동부 경남의 유적 중 남명 조식과 관련한 유일한 유적이며, 그의 학문과 사상이 정립되던 시기의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산해정길 123-26
기양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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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함안군역사관광

기양서원

기양서원은 1701년(숙종 27)에 주세곤, 주선원, 주각, 주재성, 주도복 등 다섯 사람을 추향하기 위하여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에 창건되었다. 기양서원 인근 주재성의 생가에는 무기연당이라는 조선후기 연못이 아직 남아 있다. 주재성은 조선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함께 난을 진압한 인물로 관군들은 돌아가는 길에 그의 덕을 칭송하여 마을 입구에 창의사적비를 세우고 기양서당 앞 넓은 마당에 연못을 만들었다. 현재의 무기연당 내에는 연못을 중심으로 풍욕루, 창정각, 충효사, 하환정이 있다.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무기1길 33
기강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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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의령군역사관광

기강서원

기강서원은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식성군 이운용(1562~1610) 장군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유림과 후손들이 건립한 서원이다. 장군의 묘소는 원래 고향인 경북 청도군 법귀산에 안장되었으나, 인조 8년(1630년) 장자인 이엄(평택 현감)이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 산 30-1로 이장하였다. 이에 경남지역 유림에서는 장군의 묘소 앞에 서원을 건립하기로 합의하고 정재를 모아 1950년 4월 통영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충열사 앞에 이운용의 기적비를 세웠다. 서원 건립은 6.25 전쟁으로 지연되었다가 1959년 방후손, 이기환이 유림과 상의하여 식성군유적보존회를 결성하고, 기강서원 건립에 착수하였다. 이때 정부에서 윤보선 대통령과 백낙준 참의원의장, 장면 국무총리, 곽상훈 민의원의장 등 삼부 요인을 비롯한 저명인사의 거국적인 의연금이 답지하였고, 경남지사 이중헌과 교육감 이윤근 등의 주도하에 원활한 재정 지원이 이루어져 서원이 건립되었다.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
기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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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예천군역사관광

기천서원

예천군 용궁면에 있는 기천 서원은 1665년(현종 6)에 고려 인물인 안준을 비롯하여 이문흥, 문근, 문관, 이구 등 5위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기천 정사를 세웠다. 이후 1692년(숙종 18)에는 용궁 월오리로 1차 이건 하였으며, 1703년 (숙종 29)에는 향내 유림의 합의에 따라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12년(숙종 38) 현 위치인 용궁면 월오리 오룡곡으로 옮겨 재건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8년 설단하고 제향하였다. 경내에는 명교당과 1928년 복원된 상절사, 내삼문이 있다. 매년 봄, 가을로 향사를 지내다가, 현재는 음력 9월 20일에 한 번 제사를 지낸다.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나산길 35-9
기양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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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역사관광

기양서당

기봉 유복기(1555∼1617) 선생과 회헌 유의손(1398∼1450)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원래 후손들의 글공부를 위해 서당으로 세웠던 것인데 후손들이 서원으로 바꾸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하댐 건설로 1988년 현재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유의손 선생은 조선 전기 학자로 여러 벼슬을 거치고 문장에도 뛰어났다고 하며, 유복기 선생은 조선 중기 학자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도 활약했던 분이다. 사당인 추원사는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人] 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강당 건물인 역락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이며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여덟 팔[八] 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경관이 좋은 데에 자리 잡고 있는 건물로 전주 유 씨 집안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용계로 1698
금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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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청도군역사관광

금호서원

금호서원은 동계 이운룡 장군과 향산 백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운룡(1562∼1610)은 선조 18년(1585)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워 경상우수사 겸 3도 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이 서원은 원래 이운룡의 출생지인 매전면 온막리에 상충사를 세우면서 유래되었다. 순조 14년(1814)에 이서면 금촌리로 옮겼으나 고종 5년(184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고 남은 강당을 지금 있는 자리에 이전하면서 효충사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1947년에는 서원을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배치는 외삼문인 시덕문을 들어서면 강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강당의 뒤쪽에 내삼문이 있으며 그 안쪽으로 현충사가 있다.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삼성산길 106-58
금호서원(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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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산시역사관광

금호서원(경산)

경산 금호서원은 문경공 허조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1922년부터는 허후와 허조를 함께 배향하고 있다. ‘준도문’이라 편액 한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 하여 강당인 수교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마당의 좌측에는 평기와를 얹은 4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 성경재를 두었다. 성경재와 마주 보는 마당 우측의 경사진 대지 위에는 사당이 배치되어 있는데, 사당의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이루게 하였으며 담의 정면에는 3칸 규모의 평대문인 내삼문을 세웠다.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가마실길2길 32-1
금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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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포항시 남구역사관광

금산서원

금산서원은 1707년(숙종 33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허진수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허진수는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천품이 온화하고 재기가 뛰어난 영재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도산서원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1574년(선조 7년) 나라에서 그의 학행을 가상히 여겨 통정대부의 품계를 내렸으며, 만년에는 고향에서 정자를 짓고 후진양성에 진력하니 이때부터 그곳을 금곡이라 불렀다. 금산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되었다가 1909년 유림에 의해 사당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경모사, 4칸의 수덕헌, 3칸의 동재, 외문, 4칸의 고사 등이 있다. 사당인 경모사에는 허진수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수덕헌은 강당으로서 방과 마루로 되어 있는데, 방은 헌관 및 별유사, 재석실로 사용하며, 마루는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신문은 향사 때 재원의 출입문으로만 사용하고 있으며, 동재는 재원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고사는 서원을 관리하는 고자가 사용하는 곳이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신창길191번길 25-12
금곡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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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예천군역사관광

금곡서원

금곡서원은 1568년(선조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치암[恥菴] 박충좌[朴忠佐] 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뒤 박눌[朴訥]과 박손경[朴孫慶]을 추가로 배향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84년 유림에 의해 회산사[晦山祠] 터에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길 174
근성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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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역사관광

근성서원

1812년(순조 12) 의성군 안평면 하평리에 조선 개국공신인 김인찬[金仁贊]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이곡서원[尼谷書院]으로 창건하였고, 의성군 비안면으로 이건 했다가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 그 뒤 1926년에 현 위치에 복설, 근성[芹城]으로 서원명을 고쳤다. 경내의 건물은 사우와 강당, 전사청, 내외삼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담장을 둘렀다. 서원의 경내는 매우 경사져서 강당과 사당의 고저차가 많이 난다. 구성은 외삼문을 들어서면 숭의당[崇義堂]이라고 현판을 단 강당이 전면으로 보이고, 강당 뒤쪽으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사당영역에 이른다. 한편 강당 우측방 입구 위에는 양직재[養直齋]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사당에는 원훈사[元勳祠]라는 현판이 걸려있으며, 사당영역의 담장 밖 우측에 전사청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서재는 따로 없다.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긴대골길 10
귀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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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귀산서원

1786년(정조 10)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서유(徐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귀산서사(龜山書社)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39년(헌종 5)에 ‘구산’이라고 사액 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848년에 서일원(徐一元)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83년 지방 유림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년 2월 상정(上丁)과 8월 상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구산서원길 71-12
금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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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 강진군역사관광

금산원

금산원은 1842년에 창건한 언양 김 씨 원사로 감성재라 하고 위열 김취려를 주벽으로 김자수와 김성진을 배향, 삼위를 모셨다. 운영이 어려운 나주의 정열사를 1940년 경 이곳으로 옮겨 정렬사로 개명하고 김천일을 주벽으로 김자수, 김상건 삼위를 배향했다. 그 뒤 1964년 정렬사가 다시 나주로 옮겨지자 김취려를 주벽으로 모시고 김자수, 김천일, 김성진, 김상건 오위를 향사하면서 금산원으로 액호를 바꾸고 건물이 퇴락됨에 따라 1981년 2차례 중수하였다. 건물은 4동으로 강당, 신실, 내삼문, 외삼문이 있다. 김취려는 고려의 명장으로 박달제 등에서 거란군을 물리쳐 영남의 지킨 공훈을 남겼으며 현 국무총리격인 문화시중을 역임했고, 김자수는 문과에 급제 홍문관 응교 및 강진현감과 강원감사직을 끝으로 창평의 월봉산에 상월정을 건립 후학을 양성했다. 김천일는 나주에서 태어나고 이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92년(선조 25) 의병을 일으켜 창의사의 군호를 받았다. 진주성에서 아들 상건과 함께 순절하였다. 김성진은 유년부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임란이 일어나자 4종 형인 김천일 막하에서 아들 전, 홍과 함께 군량미를 조달 보급하였다. 김상건은 김천일 장남으로 임란 때 종군하여 진주산성 싸움에서 부자가 같이 순절하니 충효의 가문을 이루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강진군 군동면 동관덕길 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