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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역사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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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콘텐츠 1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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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제탯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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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역사관광

동편제탯자리

남원시 운봉읍 비전마을은 동편제 판소리의 창시자인 가왕 송흥록 선생이 태어난 곳이며, 여류 명창 박초월의 소리의 고향이다. 예로부터 운봉은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하나인 옥보고가 거문고를 크게 발전시킨 곳(운상원)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순조 때 화수리 비전마을에서 태어난 송흥록 선생은 민속음악 가운데 가장 느린 진양조를 판소리에 응용, 판소리의 표현 영역을 확대시키는 등 다양한 음악 기교를 사용함으로써 극적이면서도 예술적인 판소리를 완성시킨 인물이다. 특히, ‘춘향가’의 옥중가 중 귀곡성(귀신 울음소리)은 그가 창작한 독창적인 판소리 창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송흥록 선생으로부터 출발된 동편제는 형의 고수로 지내다가 뒤에 형에 버금가는 명창이라는 소리를 들은 아우 송광록과 손자 송만갑이 대를 이어온 이후 계층과 지역을 초월한 광범위한 애호를 받는 예술로 부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무덤에서는 ‘내 소리를 받아 가라’는 귀곡성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2000년부터 비전마을에 국악 성지가 조성되며 송흥록 선생 생가와 박초월 명창 고택이 복원되었다.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운봉읍 비전길 7
덕음암(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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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역사관광

덕음암(남원)

덕음사(德蔭寺)는 남원시 덕음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전망이 좋아 남원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덕음사가 자리한 곳에 조선시대에 조성한 석불 좌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옛 절터인 것은 분명 하나, 이를 확인할만한 문헌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이 아쉽다. 지금의 덕음사는 1929년에 응수 스님과 노영준(魯英俊)의 협력으로 창건되었다. 일부 자료에는 노영준을 스님으로 적고 있기도 하는데, 현재 덕음사에서 전하기로는 노영준은 신도이고 당시에는 응수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고 한다. 1941년 무렵에는 덕음포교당으로 있었다. 그 뒤 1960년부터 혜봉 김완진(金完鎭) 스님이 오랫동안 주석 하면서 미륵전, 삼성각, 종각, 염불당, 원주당, 산신각, 요사 등을 건립 중창하여 규모를 일신하였다. 현재는 선옥 스님이 주지로 주석하고 있다. 1949년에는 미륵전과 산신각을 새로 지었으며, 1960년대 후반 범종각을 새로 짓고, 1986년에 삼성각(칠성각)과 염불당을 늘려지었다. 또한 창건 당시의 초가 요사를 뜯어내고 원주당을 지었다.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소리길 122-24 (어현동)
대곡리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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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역사관광

대곡리암각화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나 동굴벽에 기호나 물건, 동물 등의 그림을 새겨놓은 것을 말하는데, 주로 농사의 풍요와 생산의 의미를 지니는 주술행위의 결과물로 보인다. 대곡리암각화는 봉황대로 불리는 구릉의 정상 부근 암벽에 새긴 것으로, 호남지방에서 유일한 선사시대의 암각화이다. 암각화는 두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크기는 1∼2m 내외이며, 상하 혹은 좌우 대칭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겼다. 마모가 심하여 자세하지는 않지만, 사람이나 짐승의 얼굴을 묘사한 듯하다. 이 암각화는 1991년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되었으며, 전북지방의 선사시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대산면 대곡리
남원몽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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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역사관광

남원몽심재

남원 몽심재는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에 있는 고택으로, 이전에 거주하던 박인기의 7대 조인 죽산 박 씨 박동식(1753~1830)이 세웠다고 한다. 조선 후기 전북 지방 상류 가정의 전형적인 가옥 형태를 잘 보전하고 있다. 산을 등지고 있는 집 앞으로는 낮은 구릉이 자리하고 있다. 여러 채의 건물이 산자락의 급한 경사면을 따라 앞뒤로 자리하고 있어 높이를 달리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보이며, 그 뒤편의 바깥채와 중간문을 각기 높이 쌓은 축대 위에 세웠다. 안채에도 아래의 공간을 외양간으로 사용할 만큼 높은 받침부를 두었다. 평면 배치상 특이점은 안채 서측에 마루와 방을 두어 주부의 생활이 편리하도록 배려하고 대청 동측에 도장을 설치하고 건넌방을 아래쪽에 두어서 채광이 잘되도록 하였다. 또 사랑채에는 방을 일곱 개나 두어 대청보다는 실제 주거 공간의 확대를 꾀하고 있는 등 매우 치밀하고 깊은 배려 끝에 이 집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는 매우 호화롭게 지어졌는데 전면에 세워진 기둥이 모두 팔각기둥을 사용하고 있어 매우 희귀한 예이며 주초도 이러한 기둥에 걸맞도록 정성껏 다듬어진 것을 사용하였다. 아랫사람들이 거주하는 문간채 동쪽에 대청 한 칸을 둔 것은 다른 상류 가옥에서는 볼 수 없는 예로서 하층민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들이 높이 솟아 있음에도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멋과 그윽한 정취를 자아내어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준다.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수지면 내호곡2길 19
남원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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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역사관광

남원읍성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지역에 소경(지방도시)을 설치하였고, 691년에 쌓은 네모난 형태의 평지 읍성이다. 1597년에는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성을 크게 다시 쌓고 수리하여 담을 높였다. 그해 8월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왜군에게 크게 패했고, 이때 싸우다 죽은 군인과 주민들의 무덤이 만인의총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많이 허물어져 약간의 성터 모습만 남아있다. 돌축대의 길이는 2.4㎞가 넘고, 높이 약 4m에 이르며 성 안에는 70여 개의 우물이 있었다. 성 내에는 남북과 동서로 직선대로가 교차하고, 그 사이에도 너비가 좁은 직선도로가 교차하여 바둑판 모양의 도로구성을 볼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 도시가 들어서며 성곽은 대부분 헐려나갔으나, 시내 중심부의 도로는 지금도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어, 과거 성내의 가로 구성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 읍성의 가장 전형적인 구조를 하고 있으며, 규모가 크고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네모 반듯한 구성과 성내의 가로가 직선으로 구성된 점이 흥미롭다.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동충동
남원 만인의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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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만인의총

만인의총은 정유재란(1597) 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 관. 군 1만여 의사의 호국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1592) 때 호남을 침범하지 못해 승리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왜군은 1597년 11만 대군으로 다시 침략하여 적의 우근은 전주성을, 좌군과 수군 5만 6천은 남원성을 공략하였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해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1천여 군사와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 병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과부적으로 주민 6천여 명을 포함한 1만여 의사들은 분투 끝에 장렬하게 모두 순절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피난에서 돌아온 성민들은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1612년(광해 4년) 충렬사를 건립하였다. 몇 번의 이전을 거쳐 정부의 지원과 전 도민의 정성 어린 헌수로 현재의 충렬사에 50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만인의총에서는 매년 9월 26일에 만인의사에 대한 제향을 올려, 그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이곳은 문화관광해설사와 관람하며 호국선열에 대한 감사함을 되새기고, 소중한 추억을 담을 수 있다.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만인로 3 (향교동)
귀정사(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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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정사(남원)

귀정사는 백제 무녕왕 15년(515년)에 현오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본래는 만행사(萬行寺)라 불렸다. 이후에 백제의 왕이 절에 참배를 와서 고승(高僧)의 설법에 탄복하여 3일간 절에 머무르며 국정을 살피고 돌아갔다 하여 귀정사(歸政寺)라 고쳐 불렀다. 왕은 “죽고 살기를 스님과 더불어 같이 한다”는 글귀를 남겼다고 한다. 1221년 대방(남원의 옛 이름) 태수 복장한(卜章漢)의 요청으로 귀정사에 제2의 백련결사를 개설했다. 고려 목종 5년(1002년) 대은스님이 크게 중창하였고, 조선 세조 14년(1468년)에 낙은스님이 각각 두 차례에 걸쳐 크게 중창하였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모두 소실됐다. 현종 5년(1664년) 설제대사가 비교적 옛 모습대로 고쳐졌고, 순조 4년(1804년)에 현일대사가 다시 보수하였으나, 우리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 와중에 옛 건물이 모두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옛 귀정사에는 법당, 정루, 만월당, 승당, 연화당, 삼광전, 문수전, 명월당, 시왕전, 향로전, 영당의 전각이 있었으며, 부속 암자로는 남암, 상암, 대은암, 낙은암 등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귀정사에 살던 스님들이 모두 흩어지자 만공스님이 큰 법당에 모셔졌던 삼존불상을 충청도 수덕사 대웅전으로 옮겼고, 지금도 그곳에 모셔져 있다. 1968년 유정동 스님이 보광전, 승당, 요사채를 복원하였다. 2006년부터는 새로운 대승불교운동인 인드라망생명공동체 활동의 터전이 되면서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보광전 개축, 만행당, 관음전, 산신각, 종각 등을 새로 건립하였고, 인드라망 수련원, 만행산 귀농학교, 숲살림원, 사회연대 쉼터 인드라망 등이 운영되고 있다.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산동면 대상2길 246
대복사(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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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복사(남원)

남원의 서쪽 교룡산 자락에 자리한 대복사는 신라시대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사찰이라 전한다. 도선국사는 남원의 지세가 재물을 가득 실은 배(船)의 형국이고, 교룡산이 배를 덮치는 험한 파도로 보았다. 이에 주산인 백공산의 약한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선원사(禪院寺)를 창건하고, 객산인 교룡산의 강한 기운을 누르기 위해 대복사의 전신인 대곡암(大谷庵)을 창건한 것이다. 따라서 풍수적으로 볼 때 대복사는 파도를 막는 방파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조선 후기에는 절이 매우 퇴락하였던 것을, 뱀으로 화할 업보를 면하게 된 ‘대복(大福)’이라는 한 중생이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사찰을 중수함으로써 그의 이름을 따서 대복사로 사찰명을 바꾸었다고 한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매우 번창하여, 남원지역 불교학생회와 청년회가 이곳 대복사를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한 까닭에 두고두고 사찰의 자랑으로 삼을 만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급변하면서 사찰도 퇴락하였다가, 2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예전의 명성을 되찾고자 하는 운동이 시작되고 있다. 예전 대복사의 불교활동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학생회를 다시 구성하고, 일반인을 상대로 한 다도강좌주말수련프로그램 등 다양한 문화활동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획들이 실현되는 앞날에 대복사는 다시 한 번 남원 땅에 큰 법음을 울릴 수 있을 것이다.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대복사길 61 (왕정동)
남원 실상사 석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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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실상사 석장승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한다. 남원 실상사 석장승은 실상사를 지키는 돌장승으로, 원래는 냇가에 모두 4개가 있었다. 그러나 1936년 홍수 때 1개가 쓸려 내려가 현재는 3개만 남았다. 남아있는 3개의 장승은 각각 ‘대장군’, ‘옹호금사축귀장군’, ‘상원주장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세 장승 모두 머리에 모자를 쓰고 튀어나온 둥근 눈에 주먹코와 커다란 귀를 갖는 등 비슷한 양식을 보이며, 장승에 새긴 기록으로 보아, 같은 시기인 1725년(조선 영조 1)에 세운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배치해 음양의 조화를 꾀하는데, 이곳 장승은 모두 남자 형태이다. 귀신을 쫓는 장승들의 표정이 험상궂기는커녕 오히려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다. 주변에는 실상사 외에 지리산산내들펜션 야영장, 지리산국립공원 등이 있어 연계하여 관광할 수 있다.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남원 흥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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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흥부마을

남원시 아영면 성리 마을은 판소리 다섯 마당 중의 하나인 흥부전의 배경이다. 이곳은 전해내려오는 설화와 지명을 근거로, 흥부가 정착하여 부자가 된 발복지(發福地)로 밝혀졌다. 이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복덕가(福德家) 춘보 설화(春甫說話)가 전해져 오고 있다. 흥부가와 춘보 설화는 가난 끝에 부자가 된 인생역정, 선덕의 베풂을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 내용이 유사하다. 실제로 성리 마을에는 박춘보(朴春甫)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다. 매년 정월 보름에 망제단에서 흥부를 기리는 춘보망제를 지내오고 있다. 성리에는 흥부전에 등장하는 지명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다. 허기재, 고둔터, 새금모퉁이, 흰묵배미 등의 지명은 고전에도 등장했던 지명이다. 지금은 길 양쪽으로 감자 농사가 한창인 ‘허기재’는 허기에 지쳐 쓰러진 흥부를 마을 사람들이 도운 고개라고 전해진다. ‘고둔터’는 고승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흥부에게 잡아 준 명당으로, 흥부는 이곳에서 제비를 고쳐준 발복 집터이다. 실제 ‘고둔’이라는 지명은 곳집(창고)이 모이는 터, 즉 부자가 되는 터라는 뜻이다. 이곳은 장수군 번암면으로 넘어가는 짓재 고갯마루에 높다랗게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의 산자락과 이웃 논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금 모퉁이’는 사금꾼들이 금을 채취하던 곳으로, 흥부가 이곳에서 금을 주워 부자가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한편, ‘흰죽배미’란 장소는 흥부가 부농이 된 후 은인들에게 보답으로 주었다는 논으로 전해진다. 흥부 아내가 이웃들이 흰죽을 먹고 살아나서 ‘흰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노디막거리’는 흥부가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부가 화초장을 지고 건넜다는 개울로 추정된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덮여있지만 개울가에는 억새가 무성히 자라고 있다. 이곳저곳을 거닐면서 형제간의 우애, 부(富)와 빈(貧), 성공한 이후에도 어려웠을 시절 함께 했던 이웃을 잊지 않은 겸손과 나눔의 정신을 되돌아봄직하다.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아영면 흥부로 275
남원 신계리 마애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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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신계리 마애여래좌상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은 풍악산 동쪽 중턱에 우뚝 솟은 바위의 남면에 새겨진 불상으로 자연 암석의 한 면을 다듬어 거기에 부처의 앉은 모습을 돋을새김 한 마애불이다. 고려 초 도선스님이 하룻밤 만에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줄에 꿴 구슬로 둥글게 감싸 몸 둘레에 서린 빛을 표현한 것은 희귀한 예이다. 왼쪽 어깨에 걸친 옷은 단순한 선으로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이목구비를 비교적 생동감 있게 조각하였다. 넓은 어깨, 불룩한 가슴, 통통한 팔, 다리에도 입체감이 실려 있어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코와 양 귓불 일부분이 부서져 없어졌으나,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조성 배경을 알 수 없다.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은 상호의 표정에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으나 경직된 분위기와 법의 주름에 보이는 선각 기법 등을 통하여 고려시대 전기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대산면 신계리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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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령암지 마애불상군

지리산 정령치에 연이은 고리봉 아래 개령암 터 뒤 절벽에 새긴 이 마애불상군은 크고 작은 12구의 불상으로 이루어진 규모가 큰 불상군이다. 울퉁불퉁한 자연 암벽이어서 조각 자체의 양각도 고르지 못하고 훼손도 심한 편이나 3구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 가운데 가장 거대한 불상은 4m나 되는데 조각 솜씨도 제일 뛰어나 본존불로 여겨진다. 얼굴은 돋을새김이지만 신체의 옷 주름은 선으로 처리를 하고 있어 일반적인 고려 마애불의 수법을 따르고 있다. 또한 큼직한 얼굴과 형식화된 이목구비, 장대해진 체구와 간략해진 옷주름 등에서도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거대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2m의 작은 불상들 역시 조각 수법이 모두 같으며, 각 부분의 양식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서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규모가 큰 불상군은 희귀한 예로서 명문까지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마애불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산내면 정령치로 1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