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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역사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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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콘텐츠 1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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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서원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역사관광

만화서원

제주고씨 고인상이 선조 문충공 고경을 주벽으로, 문영공 고용현과 화당 고만욱을 추배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고창군 신림면 무림리 만화마을에 위치해 있다. 문충공파 파조 고경은 고려말의 문신으로 호는 휴옹, 시호은 문충 또는 문영으로 이부상서 백연의 아들로 다섯 살에 시를 지었고 열두 살에 논어를 외우니 당시에 옥산의 신동이라 하였다. 충렬왕 18년(1292) 16세에 친명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등이 공을 스스의 예로 존경하고 충효가 동방의 으뜸이 된다 하였다. 또한, 고용현은 고려 후기의 충신이며 고만욱은 고인상의 부친으로, 부모상을 당했을 때 예를 극진히 하였다고 한다. 만화서원의 사당은 3칸, 강당은 4칸으로 모두 팔작지붕이며 동재는 4칸, 서재는 3칸이다. 그 외에 외삼문 1동이 있다. 문충고파 고씨 후손들은 전라북도 옥구군 옥산면의 염의원과 이곳 만화서원에서 공을 주벽으로 모시고 매년 제향을 올리고 있다. 만화서원은 고려 후기의 제주고씨 고경과 고용현의 충신으로서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신림면 만화길 50
도솔암(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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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역사관광

도솔암(고창)

도솔암의 정확한 창건사실은 알 수 없으나, 사적기에는 선운사와 함께 백제때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신라 진흥왕이 말년에 왕위를 버리고 도솔산의 한 굴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에 바위가 쪼개지며 그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출현하는 꿈을 꾸고 이에 감응하여 중애사, 선운사, 도솔사 등 여러 사암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미륵삼존의 출현이나 도솔이라는 이름 등은 도솔암을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창건된 사찰임을 추측하게 한다. 특히 도솔암 서편의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좌상은 고려 초기의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는 데서도 도솔암과 미륵신앙의 깊은 연관성을 말해준다. 현재 도솔암의 전각은 대웅전, 나한전, 도솔천내원궁,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도솔길 294 도솔암
도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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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당

도산서원의 초창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7세기 경 진사 오도환이 자신의 자제와 인근 아이들을 교육하던 곳이다. 예조참판을 역임한 오도환의 사위 정택신이 물려받아 집과 함께 관리하였으나 1862년에 만수 김영철이 매수하였다. 김영철이 옛 서당을 헐고 새 건물을 짓기를 원하자 김영철의 장손인 회천 김재종이 작은아버지 김순묵의 조언을 받아 1907년에 새롭게 강당을 건립하였고, 김영철의 호를 따 ‘만수당’이라 편액 하였다. 도산리에 자리 잡고 있어 도산서당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일명 섬뜸서당이라 불렸으며, 일찍부터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도산서당의 동쪽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회천정사가 배치되어 있고, 뒤쪽에는 연지를 파고 후원을 꾸몄으며, 연지 옆에는 작은 정자가 세워져 있다. 비교적 관리가 잘 되고 있지만, 건물 왼쪽 쪽마루에 훼손이 있고, 기단부가 밀려나고 있다. 만수당의 편액은 전라감사 김성근의 필체이다.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1길 4
도동서원(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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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역사관광

도동서원(고창)

도동서원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신림면에 위치해 있다. 도동서원은 도동사라고도 불리며, 고창군의 향토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동서원은 1928년에 지역의 유림들이 나라에 충성을 하고 절의를 도모하고자 방호정사 안쪽에 지은 사당이다. 방호정사는 한말의 수남 고석진(1856~1924)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도동서원(도동사)에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순절한 의병 대장 면암 최익현(1833~1906)과 수남 고석진(1856~1924), 송천 고예진, 송제 고용진 등이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이들은 최익현을 따라 항일 의병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1919년에 한국의 독립 청원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 보냈으며, 이로 말미암아 일제의 탄압을 받은 분들이다.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1길 64
김기서강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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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서강학당

조산저수지 가는 길의 축령산 자락이 이어진 마을에 위치한 조선 전기 강학당으로, 김기서 강학당은 광산김씨 사당인 노산사 안에 있다. 김기서는 광산인으로, 자는 시견, 호는 돈목재이다. 성균관 직강으로 통정대부까지 오른 매산 김석원의 조카로, 효성이 지극하여 1508년 중종으로부터 광릉 참봉에 제수되고 장려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조광조 문하에 들어가 매형 양팽손 등과 강론하다 15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조광조와 신진사림들이 대거 숙청당하자 상평리에 은거하면서 두문불출하였다. 조광조의 학문에 심취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고자 김기서 강학당을 세웠다. 원래 이 자리에는 전불사의 불당이 있었다. 1548년(명종 3)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이고, 내부는 베갯마루 대청의 중당 2칸, 좌협실 2칸, 우협실 1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조선 초기의 소박한 공청건물이다. 광산김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수면 사동길 40-160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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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동학농민혁명은 한국근대사에서 전국에 걸쳐 사회개혁 의지를 처음으로 드러낸 역사적인 사건이다. 고창 무장기포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권운동이기도 한 동학혁명의 시발점으로 의미가 매우 큰 유적지이다. 고창군에서 대산면으로 가는 국도 22호선 왼쪽 구수마을 일대에 위치하여 있다. 참고로, 무장은 지명이며 기포지는 동학농민혁명 포고문을 선포한 집결지를 의미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참뜻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이곳에는 동학농민혁명의 훈련장으로 사용된 터와 [갑오동학농민군 고창주 의장 추모비]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갑오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전봉준 총대장, 김개남 총관령과 손화중 총관령 세 지도자와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창군으로 통합되기 이전인 고창현, 무장현, 홍덕현을 의미하는 늘 푸른 소나무 세 그루를 상징적으로 식재해 놓았다. 기존 기포지에 설치되어 있었던 동학농민혁명 기념탑과 조형물들은 고창동학농민혁명 성지화사업 진행으로 (구)신황초등학교에 옮겨 놓았으므로 함께 연계해서 방문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계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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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서원

공의로 김지대(1190~1266)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현재의 경상남도 밀양군 청도면 두곡리에 남계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사당의 명칭을 충효사라 하고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을 담당하다가, 고종 51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위패는 뒷산에 묻고 단을 세워 향사하다가, 1907년에는 후손들이 강당인 쌍수당을 중건하기도 하였다. 그 뒤 전라북도 무장향교 관내 유생들이 발의하여 1982년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고, 명칭을 계산서원이라 하였다. 서원 내에는 사당인 상충사 3칸, 강당인 경의당 4칸, 감모재 5칸, 내삼문, 정문인 쌍수문, 고직사 등이 있다.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상하면 상라길 117
고창 분청사기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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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분청사기요지

전북 고창군 수동리에 있는 분청사기 가마터로, 구릉 위 작은 저수지의 경사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으며, 가마벽 부분·도자기 만들던 도구·분청사기 조각들이 널려있다. 그릇은 대접·접시·잔·항아리·큰 사발 조각이 주류를 이루며, 유약의 색은 회청색을 띠고 그릇을 빚던 흙에는 이물질이 많이 섞여 있다. 문양은 연꽃무늬, 물고기 무늬, 모란무늬들이 대범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일부 그릇에 ‘내섬(內贍)’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전라도지방의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널리 발견되는 것으로 관청용 분청사기도 제작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부안면 수동리
고창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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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향교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창향교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월곡리에 있던 학당사을 옮겨온 것으로, 조선 중종 7년(1512)에 다시 지었다. 대성전은 선조 38년(1605)에 수리하였고, 1974년에 기와를 보수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고창향교는 이 지방의 향토사 연구에 필요한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다.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 향교길 27-3
고창 무장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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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무장객사

고창군 무장면에 있는 무장객사는 조선시대 무장현에 내려온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조선 선조 14년(1581)에 건립되었다. 본관에 걸린 궐자를 새긴 나무 패는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과 지방관리들은 여기에 경의를 표했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면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축하의식을 행하였다. 본관은 돌을 쌓고 그 위에 세운 것으로 계단에 새긴 호랑이, 구름 등의 조각이 운치가 있다. 좌우 건물의 지붕이 본관보다 낮은 점은 격을 낮추기 위해서이다. 이 객사의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초석 석재 하부는 네모지게 상부는 반구형으로 다듬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것 외에 별다른 특징은 없다. 건물 정면의 정원이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객사 건물은 면사무소로 사용하면서 일부 형질을 변경했던 것을 1990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무장객사 뒤편에는 무장수령이 관아를 통치하던 관청의 건물인 동헌이 위치해 있어 함께 둘러볼 수 있다.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무장면 무장읍성길 45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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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무장읍성은 1417년 무장진의 병마사에 마을을 다스리는 기능을 주어 무장진 병마사 김노가 쌓은 길이 약 1.2㎞의 평지성이다. 읍성의 남문인 진무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동문터도 잘 남아 있다. 성 주위를 둘러싼 물길인 해자는 폭 4m, 길이 574m 정도로 그 흔적만 남아있다. 성 안의 건물로는 객사, 동헌이 있다. 에 의하면 읍성의 둘레는 1,470척(약441m), 높이 7척(약 2m)이며 해자의 둘레는 2,127척(약 638m)이고 문은 2개가 있으며 성의 규모를 넓혀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흙으로만 축조된 토성으로 알려져 왔던 이 성이 공사 때 성벽 동쪽 끝부분의 단면이 드러났었는데 성곽일부가 흙과 돌을 섞어서 축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1915년에 발견된 에 의하면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0,000여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 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 전한다. 한편 1894년 일어났던 동학 농민혁명은 이곳 무장읍성에서 맨 처음 봉기하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무장읍성은 조선시대 옛 읍성의 모습을 연구하고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무장면 무장읍성길 45
김정회고가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1유형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역사관광

김정회고가

조선 개국공신 김사형의 후손으로 학자이며 예술가인 보정 김정회(1903∼1970)의 생가로 김정회의 고조 때부터 살던 곳이다. 고가가 위치한 도산마을은 안동김씨와 청도김씨의 세거지로서, 다른 곳에 비해 고가가 많이 남아 있는데, 김정회고가는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고가이다. 현재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사랑채, 사당, 곳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면 6칸·옆면 3칸의 안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후대에 양쪽에 각각 1칸씩 덧붙였다. 안마당보다 높이 자리 잡고 있는 안채의 양식은 다른 집에 비하여 특이하다. 안채의 앞쪽에 위치한 사랑채는 앞면 4칸·옆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안채와 사랑채에 비해 훨씬 뒤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행랑채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이다. 안채의 양쪽으로 곳간채가 1동씩 있으며, 뒤로는 사당이 있다. 조선 후기에 지은 전형적인 상류계층의 가옥으로 현재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외부관람은 가능하며 내부관람 여부는 사전에 방문 가능 여부를 문의해야 한다.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1길 16
고창오거리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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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역사관광

고창오거리당산

고창읍에 조성된 오거리 당산은 동·서·남·북·중앙의 5방위에 당산을 조성한 것으로 자연 입석과 조형 입석으로 세웠다. 고창 오거리 당산은 1803년 3월에 고창현 중심지 세 곳에 동시에 조성되었다. 처음에는 오거리가 아니라 삼거리 당산이었다. 삼거리는 상, 중, 하 세 곳을 가리킨 말인데 세 곳에 화표석주의 당산을 세운 것이다. 현재는 기존의 삼거리 당산과 천북동과 교촌리의 자연 마을 당산을 포함하여 오거리 당산이라 한다. 상거리, 중거리, 하거리 당산은 조형 입석으로 당산을 삼았으며, 천북동과 교촌리 당산 은 자연 입석을 당산으로 삼았다. 조형 입석 가운데 하거리 당산은 진서화표의 명문이 있고, 중앙 당산은 미륵 당산으로 불교적 요소가 강하다. 반면에 자연 입석을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의 당산 입석으로 삼은 것은 민간 신앙적 요소가 강하여 불교 신앙과 민간 신앙이 합쳐진 오거리 당산인 것이다. 오거리 당산은 화표를 당산 입석으로 삼은 유일한 당산이다. 정월 대보름날 줄다리기를 한 후 당산에 줄을 감아 놓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