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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역사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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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정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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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정강왕릉

이 능은 신라 제50대 정강왕(재위 886~887)의 무덤이다. 정강왕은 경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헌강왕의 동생이다. 황룡사에 백고좌를 설치하여 왕이 친히 강연을 들었다. 정강왕은 병이 깊어지자 누이동생인 만(진성여왕)이 왕위를 잇게 하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재위 기간은 만 1년에 불과하다. 헌강왕과 마찬가지로 보리사 동남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정강왕릉은 경주 남산의 북동쪽 능선 끝자락에 있는데, 북쪽에는 헌강왕릉이 있다. 무덤의 외형은 흙으로 덮은 둥근 형태로,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밑둘레에 3단으로 돌을 쌓았다. 그중 제일 밑단만이 밖으로 약간 나왔으며, 무덤 앞에는 돌단이 있는데, 그 위에 돌로 만든 작은 제사상이 있다. 무덤의 구조는 헌강왕릉과 같다. 그러나 1993년 헌강왕릉의 내부조사 결과, 그 구조와 나온 유물들이 8세기 이전의 형식이어서 이 왕들이 왕위에 있던 9세기와는 큰 차이가 있다.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경주 경애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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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경애왕릉

신라 55대 왕인 경애왕(재위 924~927)의 무덤이다. 경애왕은 신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경명왕의 동생으로, 경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군사를 보내어 고려를 도왔다. 927년에 포석정에서 제사를 지낸 후 연회를 베풀던 중 그곳을 기습한 후백제의 견훤에게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덤은 삼릉계곡 입구의 소나무 숲 안에 있다. 무덤의 가장자리를 따가라며 둘레돌로 보이는 석재가 일부 드러나 있다.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내부 구조는 굴식돌방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진평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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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진평왕릉

경주 진평왕릉은 신라 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의 무덤이다. 진평왕은 독자적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중앙 행정부서를 설치하였다. 또한 중국의 수·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을 효율적으로 막았고, 경주 명활성을 보수하여 수도 방위에 힘썼다. 높이 7.9m, 지름 36.4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 몇 개만 남아있다. 규모로 보아 왕릉급 무덤임이 분명하며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608
견훤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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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상주시역사관광

견훤산성

산의 정상부를 따라 축조한 산성으로, 견훤이 쌓았다 하여 견훤산성이라 불린다. 이 산성뿐만 아니라 상주지역의 옛 성들이 견훤과의 관계는 삼국사기에 견훤과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상주 출신이란 기록 때문이다. 견훤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신라의 장군으로 있다가 이곳에서 군사를 양성하여, 신라 진성여왕 6년(892)에 반기를 들고 신라의 여러 성을 침공하다가 효공왕 4년(900)에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이 산성은 대체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산세와 지형을 따라 암벽은 암벽대로 이용하고, 성벽을 쌓을 필요가 있는 곳에만 성을 쌓았기 때문에 천연 절벽과 성벽이 조화를 이룬다. 성의 4모서리에는 굽이지게 곡성을 쌓았는데, 동북쪽과 동남쪽으로 난 2곳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다. 보은의 삼년산성(사적)과 쌓은 방법이 비슷한데, 정교하게 쌓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삼국시대 산성의 하나이다. 견훤산성 주변을 1시간 정도 가볍게 돌아볼 수도 있으며 백두대간 길을 이어 헬기장, 문장대까지 이어지는 속리산 등산 코스도 있다.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경주 인왕동 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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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인왕동 사지

경주 인왕동 사지는 인용사의 터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용사는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629~694)의 안녕을 비는 절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는 신라까지 정벌하려 하면서 당에 머물고 있던 김인문을 감옥에 가두었다. 신라 사람들은 그의 귀국을 기원하며 관음도량을 열었으나, 효소왕 3년(694)에 김인문이 귀국하던 중에 죽자 그의 극락왕생을 빌며 미타도량으로 바꾸었다. 인용사는 신라에서 승려나 왕이 아닌 개인을 위해 세운 최초의 사찰로서 당시 신앙의 형태를 보여준다. 2002년~2011년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4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하였다. 신라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로, 유례가 드문 亞자형 건물 터를 비롯하여 탑지, 금당지, 강당지, 회랑지, 연지와 우물 등이 확인되었다.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경주 금척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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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금척리 고분군

경주 근교 금척리 평지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로, 크고 작은 30 여기의 무덤이 모여 있다. 이곳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받은 금으로 만든 자(금자)를 숨기기 위해서 40여 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으로 지금도 이 무덤들 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 전한다. 본격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1952년에 파괴된 무덤 2기를 조사하였다. 무덤 내부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덧널(곽)을 설치한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유물은 금귀고리와 굽은 옥 등이 수습되었다. 이곳의 무덤들은 모두 경주시내의 평지 무덤들보다 규모가 작아 신라의 낮은 귀족들의 무덤으로 짐작된다. (출처 : 국가유산청)

⌖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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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경주 벽도산의 서쪽을 향한 바위에 삼존불[三尊佛]을 조각한 마애불[磨崖佛]이다. 이 불상은 가까운 곳에 있는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서방 극락세계를 다스린다는 아미타불을 가운데에 새기고, 양쪽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새겼다. 아미타불의 머리는 아주 큼직하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낮게 있어 모자를 쓴 듯한데, 이는 굴불사지의 석조사면불상과 같은 양식이다. 얼굴은 볼에 살이 올라서 매우 풍만하게 보이며 미소가 남아 있다. 어깨는 넓고 반듯하며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얇게 표현되어 몸의 굴곡을 잘 드러낸다. 오른손은 내리고 있고 왼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어서, 이 불상이 아미타불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발은 앞으로 내민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 옆으로 반듯하게 벌리고 있다. 왼쪽의 보살은 풍만한 본존상에 비해 날씬한 여성미를 강조하고 있다. 몸의 굴곡이 여실히 드러나 있으며, 발은 역시 옆으로 벌리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 위에까지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왼손에는 보병[寶甁]을 들고 있다. 이러한 손모양을 통해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인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의 보살상 또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또 다른 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이다. 이 불상들의 머리 뒤에는 모두 둥근 선으로 머리광배가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경주 굴불사지석조사면불상과 기본적으로는 같지만, 풍만성이나 발의 모양, 옷주름의 모양 등으로 보아 제작 시기가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경상북도 경주시 두대안길 69 (율동)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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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은 경주 굴불사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바위 불상으로 약 높이 3미터의 바위 네 면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서 사면석불이라 부른다. 이 사면불의 서쪽은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삼존불, 동쪽은 유리광세계의 약사여래불, 북쪽은 미륵불, 남쪽은 석가모니불을 각각 새긴 사방불의 형태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땅을 파보니 이 바위가 나와서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 기록만으로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이때쯤 불상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은 불상조각에 있어 입체의 표현, 음각과 양각의 표현, 좌상과 입상의 표현 등을 변화 있게 배치해 매우 특색이 있으며 풍만하고 부드러우면서 생기를 잃지 않은 솜씨를 볼 때 통일신라 초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 경상북도 경주시 산업로 4214-76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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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골굴암의 높은 암벽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만든 12개의 석굴 중 가장 윗부분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이다. 조선시대 겸재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에는 목조전실이 묘사되었으나 지금은 바위에 흔적만 남아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가늘어진 눈, 작은 입, 좁고 긴 코 등의 표현에서 이전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해 평면적인 신체는 어깨가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게 표현되었는데,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겨드랑이 사이에는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가 있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광배와 불상 둘레의 율동적인 불꽃무늬를 통해 흔적을 살필 수 있다. 평면적인 신체와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의 옷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U자형 옷주름 등이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와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기림로 101-5
경주 동방동 와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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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동방동 와요지

경주 동방동 와요지는 1977년 택지 조성공사 도중에 우연히 발견된 가마터로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발굴조사하여 9기의 도자기와 기와를 굽던 가마터를 발굴하였다. 그중 1기를 조사한 결과 가마의 전체 길이는 10.5m, 넓이 1.72m인 구릉 경사면을 이용하여 만든 굴가마(등요)로 밝혀졌다. 도자기를 굽던 곳의 천장 부분 벽 일부가 남아있으며, 도자기를 빚던 곳과 굽던 방 사이에는 높은 벽이 있다. 출토된 기왓조각은 고려시대에 성행한 새 깃털 모양 무늬와 연꽃무늬의 장식 기와, 그리고 조선시대에 제작된 기와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마바닥에서 출토된 건륭이 새겨진 암막새는 가마터가 없어질 당시의 것으로 생각되며, 가마터의 제작시기를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로 추정하게 한다. 가마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토기와 기와를 만들 수 있는 양질의 흙과 물, 그리고 구워내기 위한 연료가 필요한데 이곳 동방동 일대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교통로가 있어 운반도 용이하였기에 오랜 시간 도자기 생산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 경상북도 경주시 동방동
경주 재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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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재매정

경주 재매정은 신라의 김유신 장군 집에 있던 우물이다.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이 일대가 장군의 집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김유신 장군이 오랜 기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돌아오다가 다시 전쟁터로 떠날 때, 자신의 집 앞을 지나면서 가족들을 보지도 않고 우물물을 떠 오게 하여 말위에서 마시고는,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하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93년 발굴조사에서 재매정을 중심으로 사방 70m 지역을 발굴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5.7m이며, 가장 넓은 부분은 1.8m이고, 바닥의 지름이 1.2m로 벽돌같이 다듬은 돌로 만들었다. 우물 옆에 비각이 있고 비각안에 조선 고종 9년(1872)에 이만운이 쓴 비석이 있다.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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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신라시대의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석불좌상으로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한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에서는 은은하게 내면적인 웃음이 번지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힘없이 축 늘어진 느낌이며, 군데군데 평행한 옷주름을 새겨 넣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대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인데 다소 연약해 보인다. 불상과는 별도로 마련해 놓은 광배(光背)는 매우 장식적인데, 광배 안에는 작은 부처와 보상화·덩쿨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특히 광배 뒷면에는 모든 질병을 구제한다는 약사여래불을 가느다란 선으로 새겨 놓았는데, 이러한 형식은 밀양 무봉사나 경북대 광배 등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예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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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경주 남산 이 일대는 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남쪽의 큰 바위에는 목조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석탑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남쪽면의 불상을 주존으로 하여 남향 사찰을 경영했었음을 알 수 있다. 9m나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에 여러 불상을 회화적으로 묘사하였다. 남쪽 바위면에는 삼존과 독립된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고, 동쪽 바위면에도 불상과 보살, 승려, 그리고 비천상을 표현해 놓았다. 불상, 보살상 등은 모두 연꽃무늬를 조각한 대좌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 한 광배를 갖추었으며 자세와 표정이 각기 다르다. 비천상은 하늘을 날고 승려는 불상과 보살에게 공양하는 자세이지만, 모두 마멸이 심해 자세한 조각 수법은 알 수 없다. 서쪽 바위면에는 석가가 그 아래에 앉아서 도를 깨쳤다는 나무인 보리수 두 그루와 여래상이 있다. 하나의 바위면에 불상·비천·보살·승려·탑 등 다양한 모습들을 정성을 다하여 조각한 것은 장인의 머릿속에 불교의 세계를 그리려는 뜻이 역력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조각 양식은 많이 도식화되었으나 화려한 조각을 회화적으로 배치하여 보여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특이한 것이다.

⌖ 경상북도 경주시 탑골길 36 (배반동)
경양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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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김천시역사관광

경양서원

김천시 구성면에 위치한 경양서원은 송오 여응구와 그의 아들 감호 여대로 부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 하기 위해 지은 서원이다. 서원 건물 오른쪽에 사당이 있는데 철폐 이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옛날과 같이 두 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여응구는 157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론을 지냈으며, 여대로는 158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에 이르고 임진왜란 때 창의지사였다. 경양서원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94년 「금릉군지」에는 조선 숙종 때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68년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자 사당 건물은 철거하고 강당은 그대로 둔 채 현판을 ‘경양서원’에서 ‘경양서당’으로 변경하였다. 이는 서원 철폐령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 건물이며, 강당 건물의 기둥은 대추나무와 밤나무를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는 「송오문집」과 「감호문집」 판목이 보존되어 있다.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광명3길 105
경광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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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역사관광

경광서원

금계리 동편 사천 위에는 예로부터 ‘유정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선조 1년(1568)에 사림에 의해 경광서원이 세워졌다. 이후 현종 3년(1662)에는 이름을 ‘경광정사’로 바꾸고, 백죽당 배상지와 용재 이종준 두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인조 27년(1649)에는 ‘춘파이사’를 창건하여 용재 이종준과 경당 장흥효 두 선생을 모셨다. 숙종 12년(1687)에는 서원으로 승격되어 경당 선생의 위패를 경광정사로 옮기고, 백죽당과 용재 두 선생과 함께 제향 하였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873년 단소를 마련하여 향사를 이어왔다. 이후 1978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설 되어, 매년 9월 중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3길 131-24
경산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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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산시역사관광

경산향교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경산향교는 고려 공민왕 2년(1390) 옥곡동에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여러 차례 다시 세웠는데 조선 숙종 7년(1681) 신교동을 거쳐, 현재의 위치로 이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향교에 모시던 위패가 위험해지자 향교의 종이었던 강개명이 성암산 동굴로 옮겨 놓아 무사했다고 한다.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앞에 두고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뒤쪽에 둔 전묘후학의 배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 경상북도 경산시 향교길 14-19 (중방동)
경북 청송 주왕산면·파천면 [슬로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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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청송군역사관광

경북 청송 주왕산면·파천면 [슬로시티]

백두대간 오지 중의 오지 경북 청송이 2011년 6월 25일 슬로시티로 선정되었다. 슬로시티(Slow City)는 느리게 살기 미학을 추구하는 도시를 가리키며 빠른 속도와 생산성만을 강요하는 빠른 사회(Fast City)에서 벗어나 자연·환경·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여유 있고 즐겁게 살자는 취지로 시작되었으며 전통 보존, 지역민 중심, 생태주의 등 이른바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마을을 의미한다. 청송 파천면에는 대표적인 두 개의 마을이 있다. 하나는 청도 덕천마을로 청송 심씨의 집성촌이며 총 7채의 고택이 있고, 다른 한 곳은 한옥의 정취와 옛 선비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중평 선비마을이다. 두 마을 모두 수려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조선시대 가옥이 남아 있는 고즈넉한 마을이다.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한 문화 체험과 한옥스테이를 진행하고 있고, 비용은 별도 문의해야 한다.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이전앞길 1
경주 성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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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성덕왕릉

경주에서 불국사 방향으로 가는 길의 동남쪽 구릉 소나무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1~737)의 무덤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본명은 융기이다. 당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37년에 왕이 죽자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 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왕릉 북쪽에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왕릉의 밑둘레는 46m, 높이는 5m이다. 무덤 아랫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는데, 높이 90㎝ 정도의 돌(면석)을 두르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의 조각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무덤 앞쪽에는 석상이 놓여있고 무덤 주위의 4모서리에는 돌사자를 배치하였다. 석상 앞쪽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 각 1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무인석 1개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石人) 1개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에서 보이고 있는 석물의 사실적인 조각기법은 통일신라 초기 양식에 속하며,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서 완비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
경주 신무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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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신무왕릉

신라 제45대 신무왕(재위 839)의 무덤이다. 본명은 김우징이고, 희강왕의 사촌동생이다. 흥덕왕 사후에 왕위 쟁탈전에서 아버지를 도왔으나 패하여 청해진으로 도망하였다가 장보고의 군사를 빌려 민애왕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형상 서북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왕경의 동남쪽인 동방동에 있는데, 능이 있는 구릉 동남쪽 산의 이름이 형제산이다. 높이 3.4m, 지름 15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주변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다.

⌖ 경상북도 경주시 동방동
경주 헌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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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헌덕왕릉

경주 북천가에 있는 신라 제41대 헌덕왕(재위 809~826)의 무덤이다. 헌덕왕의 본명은 김언승이며,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재위기간 동안에 농사를 권장하고 당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김헌창의 난과 김범문의 난이 일어나는 등 국내정세가 혼란스러웠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26년에 왕이 죽자 천림사의 북쪽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천림사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왕릉의 남쪽에 절터가 있어 이곳을 천림사 터로 본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26m, 높이 6m이다. 봉분 밑의 둘레를 따라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둘레돌은 먼저 바닥에 기둥 역할을 하는 돌을 한단 깔고, 그 위에 넓적한 돌(면석)을 세웠다. 면석사이에는 기둥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다. 탱석에는 무덤을 수호하는 상징적 의미로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는데, 이 무덤에는 현재는 12지신상 중 돼지(해)·쥐(자)·소(축)·호랑이(인)·토끼(묘) 등 5개상만이 남아있다. 둘레돌 밖으로는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설치하고, 둘레돌과 난간 사이 바닥에는 돌을 깔았다. 지금의 모습은 1970년대에 정비된 것으로, 둘레돌의 일부와 돌난간석을 새로 만들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경주 법흥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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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법흥왕릉

신라 23대 왕인 법흥왕(재위 514∼540)의 무덤이다. 법흥왕은 신라를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체제로 완성시킨 왕이다. 왕권강화를 위해 상대등과 병부를 설치하였고, 520년 율령을 반포하였다. 532년 금관가야와 합병하여 낙동강유역에 처음 진출하였다. 신라 처음으로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중국 양[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527년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불교를 국가종교로 수용하고 고대국가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높이 2m, 지름 14m로 삼국시대 신라 왕의 무덤으로는 작은 편이다. 무덤 아래에는 둘레돌을 받쳤던 자연석이 있다. 법흥왕 이전의 왕 무덤은 평지인 경주 무덤들에 밀집되어 있어 소재파악이 어려우나, 그 이후의 왕 무덤은 구릉이나 교외에 2∼3기씩 따로 자리하고 있으며 소재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변화는 왕 무덤의 형태 변화와도 연관되는 듯한데 그 변화의 시작을 법흥왕릉에서 찾아볼 수 있어 중요한 곳이다.

⌖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경주 서악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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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서악동 고분군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 바로 뒤편의 구릉에 분포하는 4개의 대형 무덤을 가리킨다. 고분의 모양은 모두 원형이며 주위에 별다른 구조물이 없다. 봉분 가장자리에 둘렀던 둘레돌이 일부 노출되어 있는데, 모두 깬돌을 사용했다. 대부분 냇돌을 쓴 대릉원 일원의 고분들과 차이를 보인다. 내부 구조는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들보다 작은 고분들이 주변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모두 굴식돌방무덤이다. 이들 무덤이 분포한 지형은 선도산에서 서남으로 뻗은 능선상에 있고, 뒷산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사상의 영향하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 첫 번째 무덤은 법흥왕릉, 두 번째 무덤은 진흥왕릉, 세 번째 무덤은 진지왕릉,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릉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출처 : 국가유산청)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경주 지마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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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지마왕릉

신라 제6대 지마왕(재위 112~134)의 무덤이다. 지마왕은 신라 5대 파사왕의 아들로 태어나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았다. 지마왕의 재위 기간에는 신라는 백제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가야와는 낙동강 하류를 둘러싸고 패권을 다투었다. 왜인들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으나 교섭하여 강화를 맺었고, 북쪽에서 말갈이 쳐들어오자 백제의 도움을 받아 물리쳤다. 무덤은 포석정에 남쪽으로 200m 떨어진 남산 서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왕릉 중에서는 작은 편에 속하며, 외형과 입지로 보아 내부 구조는 굴식돌방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망덕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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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망덕사지

경주 낭산[狼山]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사천왕사와 마주하고 있다. 처음 지어진 때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라 문무왕 또는 신문왕 때로 전한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목탑터와 그 북쪽으로 금당터와 강당터, 남쪽으로 중문터, 그리고 이를 둘러싼 회랑터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형의 쌍탑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중문터 남쪽에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당간지주(보물)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경주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으로 그 의미가 크다.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경주 탈해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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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탈해왕릉

경주 동천동에 있는 신라 제4대 탈해왕(재위 57~80)의 무덤으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무덤의 형식 자체는 일반적이나, 신라 초기의 왕릉이고 특히 최초의 석 씨 왕릉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무덤은 높이 4.5m, 지름 14.3m 크기로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봉토무덤이다. 주변에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으며, 겉으로 보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왕릉 초입에는 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전각 숭신전이 있다. 탈해왕은 신라 최초의 석 씨 왕으로 62세에 즉위하여, 24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왜국에서 동북쪽으로 1천 리 떨어져 있는 다 파나 국(또는 완하국, 용성국)의 왕비가 잉태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그 알을 궤에 넣어 바다에 버리니 동해 아진포에 닿았다. 그때 한 할머니가 이것을 열어 보고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다. 배에 까치들이 울며 따라왔으므로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 자를 떼서 석(昔)으로 성을 삼고, 아이가 궤를 풀고 나왔다 해서 이름을 탈해(脫解)라 지었다. 탈해왕은 석 씨의 시조로서 신라 최초 석 씨 왕이 되었다.

⌖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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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은 경주 손 씨 큰 종가로 이 마을에서 시조가 된 양민공 손소(1433∼1484)가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집이다. 양민공의 아들 손중돈 선생과 외손인 이언적(1491∼1553)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一자형 대문채 안에 ㅁ자형 안채가 있고 사랑채 뒤쪽 높은 곳에 신문(神門)과 사당이 있다. 안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고 사랑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사랑방과 침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ㄱ자형으로 놓여 있는 사랑채 뒤편 정원에는 수백 년 묵은 향나무가 있다. 대개 사랑방은 큰 사랑방 대청 건너편에 작은 사랑방을 두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집은 작은 사랑을 모서리 한쪽으로 두어 방과 방이 마주하지 않도록 한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일종의 마루통로 형식으로 꾸민 점 역시 특이하다. 종가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사랑채 뒤편 정원의 경치 역시 뛰어난데 건물을 지은 수법과 배치 방법들이 독특하여 조선 전기의 옛 살림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위 국가유산은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으므로 참고해야 한다.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75-6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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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경주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 이 석불들은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三尊佛]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본존불은 머리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표면이 매끄럽게 표현되었다. 어린아이 표정의 네모난 얼굴은 풍만하며,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을 통하여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佛性]을 표현하고 있다. 목이 표현되지 않은 원통형의 체구에 손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는데,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올리고 있다. 묵직해 보이는 옷은 불상을 전체적으로 강직해 보이게 하지만, 어린아이 같은 표정과 체구 등으로 오히려 따뜻한 생명을 실감 나게 표현하고 있다. 왼쪽의 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가는 허리를 뒤틀고 있어 입체감이 나타난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 보병[寶甁]을 잡고 있는데, 보관에 새겨진 작은 부처와 더불어 이 보살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오른쪽의 보살 역시 잔잔한 내면의 미소를 묘사하고 있는데, 무겁게 처리된 신체는 굵은 목걸이와 구슬장식으로 발목까지 치장하였다. 조각솜씨가 뛰어난 다정한 얼굴과 몸 등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가 풍기고 있는 작품으로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신문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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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신문왕릉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의 무덤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로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옛 백제와 고구려 백성을 융합하는데 힘썼다. 국립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고, 귀족들의 기반이 되면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였다. 지방을 통치하기 위해 전국을 아홉 개의 주로 나누고 중요한 거점 다섯 곳에 소경을 설치하였다. 신문왕이 죽은 후에는 낭산 동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낭산 남쪽 끝자락에 있다. 무덤은 높이 7.6m, 지름 29.3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가장자리의 둘레돌은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었다. 바깥쪽 사다리꼴 모양의 석재를 받쳐 놓았다. 정남쪽에 배치한 받침석의 윗부분에 ‘문(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이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널길 입구라는 것을 표시한 듯하다.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경주 이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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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이견대

대왕암을 의미 있게 눈여겨볼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다. 대본 초등학교 앞쪽에 있는 이견대와 동해구(東海口)라는 표지석 아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서 있는 자리이다. 이견대는 화려한 능묘를 마다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곳이며 그의 아들 신문왕이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배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초석에 근거하여 최근에 지은 것이다. 동해구 표지석 아래로 내려가면 우현 고유섭 선생의 반일 의지를 기리기 위해 1985년 제자들이 세운 기념비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가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명백한 침략을 내선 합일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우격다짐에 쐐기를 박듯,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왜구의 침략을 경계한 문무왕의 호국의지를 돌이켜 생각하며 고유섭이 지은 ‘대왕암’이라는 시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대왕암이 바라다 보이는 자리에 나란히 세워져 있어 뜻이 더 깊다.

⌖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밑길 12-14
경주 구정동 방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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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구정동 방형분

경주 구정동 방형분은 경주에서 불국사로 가는 길의 북쪽 구릉자락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무덤이다. 이 방형분은 한 변의 길이가 9.5m 높이가 2m이다. 무덤의 형태는 정사각형이고 흙을 덮어 만든 봉분 아래에는 무덤을 보호하는 의미를 갖는 12지신상이 조각된 둘레돌이 배치되어 있다. 둘레돌을 배치하는 것은 삼국시대 이후부터 내려오는 전통인데, 통일신라시대 경주지방의 왕릉에서는 12지신상을 조각한 둘레돌을 흔히 볼 수 있다. 무덤 내부에는 봉분의 남쪽으로 치우쳐 직사각형의 상자형으로 축조된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있다. 시체를 모신 널방(현실)의 동쪽 벽에는 널길(연도)이 나 있다. 유물로는 금동관장신구·은제띠고리·은제행엽 등이 출토되었다. 둘레돌의 배치, 돌널(석관)의 사용, 12지신상의 조각 수법 양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기의 최고 귀족층 무덤으로 생각된다. 신라 무덤 중 유일한 네모무덤으로, 그 계통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전기에 나타나는 둘레돌을 갖춘 네모무덤의 선구적 모습으로 평가된다.

⌖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15-5 (구정동)
경주 원성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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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원성왕릉

원성왕릉은 낮은 구릉의 남쪽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 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이 있는데, 이 돌에 12 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두 쌍·문인석 한쌍·무인석 한쌍과 무덤을 표시해 주는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성왕릉의 무덤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둘레돌에 배치된 12 지신상과 같은 세부적인 수법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이다. 또한 각종 석물에서 보이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신라인의 예술적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출처 : 경주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신계입실길 139
경주 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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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나정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전설을 간직한 우물이다. 박혁거세를 기리는 유허비를 비롯해 신궁터로 추정되는 팔각건물지, 우물지, 담장지, 부속건물지, 배수로 등이 남아 있다. 특히 팔각건물지는 한 변의 길이가 8m나 되고 네모난 담장을 두른 것으로 보아 신라의 신궁터로 추정되며 이곳 나정을 박혁거세를 제사 지내는 신전으로 짐작할 수 있다. 와 에 나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 건국의 주역인 6촌의 촌장들이 모여 군주를 선출하고 도읍을 정하자고 결정한 뒤 일행이 높은 곳에 올랐다. 그런데 양산 아래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이상한 기운이 돌며 백마 1마리가 무릎을 꿇고 있어 가보니 백마는 하늘로 올라갔고 붉은색의 커다란 알만 남았는데 이 알을 쪼개자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다고 한다. 이상히 여겨 동천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고 새와 짐승들이 춤추듯 노니니 천지가 진동하며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고 한다.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성을 박(朴)이라 하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고 하였다. 아이가 13살이 되던 해인 BC 57년 왕의 자리에 올라 나를 세우고 서라벌이라고 이름지었다.

⌖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경주 배동 삼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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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배동 삼릉

경주 배동 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졌다.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 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덕왕릉이라 전해오는 가운데의 무덤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당하여,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임을 확인하였다. 무덤에는 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세워 놓은 것처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으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있다. 경주 배동 삼릉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 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 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동궁과 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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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궁과 월지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 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푼 장소이다. 신라가 멸망한 후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와 기러기 안과 오리 압을 써서 예전엔 안압지로 불렸으나 1980년대 이곳에서 월지-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고 삼국 통일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 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지는 내용으로 보아 이곳이 신라시대 때 월지라고 불린 장소로 확인되어 2011년에 경주 동궁과 월지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 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 터로 보이는 3곳과 월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중 보상화 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월지는 신라 원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서 연못 가장자리에 굴곡을 주어 어느 곳에서 바라보아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예지가 돋보인다. 동궁에는 임해전을 비롯해 총 27동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현재는 3채만 복원되었고 그 건물을 비추는 화려한 조명과 월지에 반사된 모습은 경주의 대표 야경명소로 뽑힌다.

⌖ 경상북도 경주시 원화로 102
경주 포석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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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포석정지

경주 남산 서쪽에 있는 포석정은 왕이 술을 들면서 즐길 수 있도록 마련된 별궁의 하나였으나,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조성연대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6) 때로 본다. 규모는 폭이 약 35㎝, 깊이 평균 26㎝, 전체 길이가 약 10m이다. 포석정은 중국 고대 강가에서 초혼제를 지내고 악귀를 쫓는 행사의 하나인 유상곡수연에서 유래하였다. 353년 중국의 왕희지가 쓴 난정서문에 보면 맑은 시냇물을 아홉 구비로 돌아 흐르게 하여 흐르는 물속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게 하되 술잔이 아홉 구비를 다 지날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벌술 3잔을 마시게 하였다. 유상곡수를 즐기는 주위는 높고 험한 산이 있고, 숲과 대나무숲이 있으며 옆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한다. 이에 신라에서도 험한 남산 봉우리를 뒤로 하고 죽림과 송림이 울창하고 맑은 시내가 흐르는 계곡에 포석정을 만들었던 것이다. 원래는 남산계곡에서 흘러 들어오는 입구에 거북 모양의 큰 돌이 있었고, 그 입에서 물이 나오도록 만들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져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고 삼국유사에 헌강왕이 이곳에 와서 남산 신의 춤을 따라 해 어무상심무를 만들었다 한다. 또한 이곳은 인간의 마음을 수양하고 화랑이 정신을 도야하며 시문을 짓고 속세를 떠나 유정을 느끼던 아름다운 장소였다. 927년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며 놀고 있다가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붙잡히게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신라 천 년 역사의 치욕이 담긴 장소이기도 하다. 화랑세기필사본에서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社)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1998년 남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면서 이곳에 규모가 큰 건물이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제기류도 출토되어 포석정이 연회를 즐기던 곳이 아니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을 거행하던 신성한 장소였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입구 포석정지 방문자센터에서는 포석정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모형과 영상물을 상영한다.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석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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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석빙고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