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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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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초기화
거창 황산리 신씨고가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경상남도 거창군역사관광

거창 황산리 신씨고가

조선 연산군 7년(1501)에 요수 신권이 이곳에 들어와 산 이 후, 이 마을은 거창 신씨의 집성촌으로 번창해 왔다.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이 집은 1927년 신도성이 건립한 근대기 주택으로 원학고가라고도 부른다. 당시 이 집의 주인은 큰 지주였다고 하는데, 이 집은 그러한 집주인의 경제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모두 경남 지방의 일반적인 주택 양식인 홑집 대신에 겹집의 팔작지붕으로 지어 집주인의 부와 권위를 드러내고 있으며, 사랑채는 궁궐이나 절에서 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장식물로 꾸몄다. 잘 다듬은 커다란 돌로 쌓은 받침돌과 기둥을 받친 주춧돌 위에 설치한 기둥 자리 등은 조선 중기 이전에는 벼슬이 높은 양반 집안에서도 보기 힘든 모습이다. 그 밖에 안채와 그 건물을 둘러싼 크고 화려하게 지은 부속건물들도 집주인의 경제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안채의 늘어난 방 수, 좁아진 대청, 집안에 들어선 화장실 등은 전통의 격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20세기 초 실용성을 중시하던 가옥의 변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1920년대에 지어진 이 가옥은 격식의 해체, 실용성의 증가, 심화된 경제적 계층화 등 복합적인 사회 현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1길 109-5
경주 이견대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이견대

대왕암을 의미 있게 눈여겨볼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다. 대본 초등학교 앞쪽에 있는 이견대와 동해구(東海口)라는 표지석 아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서 있는 자리이다. 이견대는 화려한 능묘를 마다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곳이며 그의 아들 신문왕이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배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초석에 근거하여 최근에 지은 것이다. 동해구 표지석 아래로 내려가면 우현 고유섭 선생의 반일 의지를 기리기 위해 1985년 제자들이 세운 기념비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가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명백한 침략을 내선 합일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우격다짐에 쐐기를 박듯,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왜구의 침략을 경계한 문무왕의 호국의지를 돌이켜 생각하며 고유섭이 지은 ‘대왕암’이라는 시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대왕암이 바라다 보이는 자리에 나란히 세워져 있어 뜻이 더 깊다.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밑길 12-14
경주 구정동 방형분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구정동 방형분

경주 구정동 방형분은 경주에서 불국사로 가는 길의 북쪽 구릉자락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무덤이다. 이 방형분은 한 변의 길이가 9.5m 높이가 2m이다. 무덤의 형태는 정사각형이고 흙을 덮어 만든 봉분 아래에는 무덤을 보호하는 의미를 갖는 12지신상이 조각된 둘레돌이 배치되어 있다. 둘레돌을 배치하는 것은 삼국시대 이후부터 내려오는 전통인데, 통일신라시대 경주지방의 왕릉에서는 12지신상을 조각한 둘레돌을 흔히 볼 수 있다. 무덤 내부에는 봉분의 남쪽으로 치우쳐 직사각형의 상자형으로 축조된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있다. 시체를 모신 널방(현실)의 동쪽 벽에는 널길(연도)이 나 있다. 유물로는 금동관장신구·은제띠고리·은제행엽 등이 출토되었다. 둘레돌의 배치, 돌널(석관)의 사용, 12지신상의 조각 수법 양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기의 최고 귀족층 무덤으로 생각된다. 신라 무덤 중 유일한 네모무덤으로, 그 계통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전기에 나타나는 둘레돌을 갖춘 네모무덤의 선구적 모습으로 평가된다.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15-5 (구정동)
경주 원성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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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원성왕릉

원성왕릉은 낮은 구릉의 남쪽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 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이 있는데, 이 돌에 12 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두 쌍·문인석 한쌍·무인석 한쌍과 무덤을 표시해 주는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성왕릉의 무덤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둘레돌에 배치된 12 지신상과 같은 세부적인 수법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이다. 또한 각종 석물에서 보이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신라인의 예술적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출처 : 경주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신계입실길 139
경주 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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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나정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전설을 간직한 우물이다. 박혁거세를 기리는 유허비를 비롯해 신궁터로 추정되는 팔각건물지, 우물지, 담장지, 부속건물지, 배수로 등이 남아 있다. 특히 팔각건물지는 한 변의 길이가 8m나 되고 네모난 담장을 두른 것으로 보아 신라의 신궁터로 추정되며 이곳 나정을 박혁거세를 제사 지내는 신전으로 짐작할 수 있다. 와 에 나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 건국의 주역인 6촌의 촌장들이 모여 군주를 선출하고 도읍을 정하자고 결정한 뒤 일행이 높은 곳에 올랐다. 그런데 양산 아래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이상한 기운이 돌며 백마 1마리가 무릎을 꿇고 있어 가보니 백마는 하늘로 올라갔고 붉은색의 커다란 알만 남았는데 이 알을 쪼개자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다고 한다. 이상히 여겨 동천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고 새와 짐승들이 춤추듯 노니니 천지가 진동하며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고 한다.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성을 박(朴)이라 하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고 하였다. 아이가 13살이 되던 해인 BC 57년 왕의 자리에 올라 나를 세우고 서라벌이라고 이름지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경주 배동 삼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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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배동 삼릉

경주 배동 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졌다.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 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덕왕릉이라 전해오는 가운데의 무덤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당하여,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임을 확인하였다. 무덤에는 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세워 놓은 것처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으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있다. 경주 배동 삼릉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 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 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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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시역사관광

경앙사

경앙사는 오진영 선생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노주 오희상을 비롯해 간재 전우, 석농 오진영 선생의 학덕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다. 매년 음력 3월 10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건물은 총 26㎡(8평)로 겹처마 맞배지붕의 한옥이며, 홍살문, 삼문, 사당 등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특히 현판 액자는 석농의 제자인 월헌 이보림 선생이 썼다고 전해지는데 여기서 경앙은 ‘산은 사람을 우러러보고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므로 천하만인에게 존경받는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오희상 선생은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었고, 정조 24년(1800) 세자익위사 세마가 된 후 여러 차례 벼슬을 하다가 사직하고 광주 징악산에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힘썼으며 사망 후엔 헌종 7년(1841)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전우 선생은 경전을 깊이 연구해 당대 최고의 학자라는 평을 들었으며 을사늑약 때 을사오적의 참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를 전하지도 못하자, 다음을 기약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의병운동과 3·1 운동 등 항일운동이 거셌던 시기라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계화도에서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6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오진영 선생은 전우 선생의 제자로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각국의 공관과 정부에 부당함을 알리는 글을 보냈으며, 이수홍과 파리 만국회의에 보낼 공문을 작성하였으나 전달에 실패했다. 1938년 화양동 만동묘 철거를 반대하고 추담별집을 간행, 배포했다. 흰옷과 검은 갓으로 끝까지 항일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경주 동궁과 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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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동궁과 월지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 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푼 장소이다. 신라가 멸망한 후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와 기러기 안과 오리 압을 써서 예전엔 안압지로 불렸으나 1980년대 이곳에서 월지-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고 삼국 통일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 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지는 내용으로 보아 이곳이 신라시대 때 월지라고 불린 장소로 확인되어 2011년에 경주 동궁과 월지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 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 터로 보이는 3곳과 월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중 보상화 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월지는 신라 원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서 연못 가장자리에 굴곡을 주어 어느 곳에서 바라보아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예지가 돋보인다. 동궁에는 임해전을 비롯해 총 27동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현재는 3채만 복원되었고 그 건물을 비추는 화려한 조명과 월지에 반사된 모습은 경주의 대표 야경명소로 뽑힌다.

경상북도 경주시 원화로 102
건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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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역사관광

건봉사

금강산 건봉사는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감로봉 동남쪽 자락에 자리한 오래된 사찰로, 석가모니의 치아 진신 사리를 모시고 있다. 한때 3,183칸에 달하는 대규모 사찰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불이문만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1994년부터 복원 작업을 시작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승려들이 승병을 조직한 곳이자 일제강점기 때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호국사찰이기도 하다. 신라 법흥왕 7년(520)에 승려 아도가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승려 발징이 절을 고쳐 짓고 1만 일 동안 염불을 외우며 수행하는 만일회를 열었으며, 이 모임은 우리나라 염불만일회(극락정토의 왕생을 기원하며 만일동안 염불하는 불교 의식)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나옹화상이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조선 세조 2년(1456)에 임금이 행차하여 이곳을 왕실의 안녕을 비는 왕실 원당(개인의 안녕이나 명복을 빌기 위해 위패나 초상화를 모신 사찰 혹은 사찰 내 전각)으로 삼고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어실각을 지으며 큰 사찰이 되었다. 조선 고종 15년(1878)에 불이 나 모두 타버려 이듬해 다시 고쳐 지었다. 대한제국 광무 10년(1906)에 개화사상 및 신문물 교육을 위한 봉명학교를 설립하여 관동지역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되었다. 1911년에는 9개 말사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되는 등 규모를 회복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고성지역에서 약 2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면서 1920년에 건립된 불이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무너지고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건봉사 터는 휴전 하며 민간인 통제선 북쪽에 속하게 되었다가 1989년부터는 민간인 출입이 가능해졌다.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
경주 포석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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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포석정지

경주 남산 서쪽에 있는 포석정은 왕이 술을 들면서 즐길 수 있도록 마련된 별궁의 하나였으나,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조성연대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6) 때로 본다. 규모는 폭이 약 35㎝, 깊이 평균 26㎝, 전체 길이가 약 10m이다. 포석정은 중국 고대 강가에서 초혼제를 지내고 악귀를 쫓는 행사의 하나인 유상곡수연에서 유래하였다. 353년 중국의 왕희지가 쓴 난정서문에 보면 맑은 시냇물을 아홉 구비로 돌아 흐르게 하여 흐르는 물속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게 하되 술잔이 아홉 구비를 다 지날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벌술 3잔을 마시게 하였다. 유상곡수를 즐기는 주위는 높고 험한 산이 있고, 숲과 대나무숲이 있으며 옆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한다. 이에 신라에서도 험한 남산 봉우리를 뒤로 하고 죽림과 송림이 울창하고 맑은 시내가 흐르는 계곡에 포석정을 만들었던 것이다. 원래는 남산계곡에서 흘러 들어오는 입구에 거북 모양의 큰 돌이 있었고, 그 입에서 물이 나오도록 만들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져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고 삼국유사에 헌강왕이 이곳에 와서 남산 신의 춤을 따라 해 어무상심무를 만들었다 한다. 또한 이곳은 인간의 마음을 수양하고 화랑이 정신을 도야하며 시문을 짓고 속세를 떠나 유정을 느끼던 아름다운 장소였다. 927년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며 놀고 있다가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붙잡히게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신라 천 년 역사의 치욕이 담긴 장소이기도 하다. 화랑세기필사본에서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社)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1998년 남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면서 이곳에 규모가 큰 건물이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제기류도 출토되어 포석정이 연회를 즐기던 곳이 아니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을 거행하던 신성한 장소였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입구 포석정지 방문자센터에서는 포석정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모형과 영상물을 상영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석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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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석빙고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경주 김유신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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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김유신묘

경주시 충효동 옥녀봉 능선에 위치한 김유신 장군의 묘로 674년(문무왕 14) 축조되었다. 김유신은 신라의 장군이자 재상으로 삼국을 통일한 공로가 컸으므로 문무왕은 비단 1,000필, 벼 2,000석을 내리고 군악고취 100명을 보내어 장사를 지내게 하며 비를 세워 공적을 새겨두고 수묘하는 백성을 배정해 주는 등 최고의 예를 베풀었다. 후에 흥덕왕대에 그를 흥무대왕으로 추봉하였다. 봉분은 30m에 달하는 큰 원형분으로 둘레에는 24장의 호석과 돌난간을 둘렀고 호석과 돌난간 사이의 바닥에는 돌을 깔았다. 그 무덤의 양식 또한 왕릉이나 다름없는 규모와 형태이다. 호석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는데, 대개의 경우 능을 지키는 수호신으로는 갑옷을 입은 조각들이 새겨져 있으나 김유신 묘의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몸체는 정면을 보고 서 있으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주시하는 모습이 이색적이며 무장을 하지 않아 매우 온화해 보인다. 경주왕릉에는 몇 군데 지신상조각이 있으나 조각의 우수함이나 상의 거대함으로는 김유신묘를 따를 수 없다. 면적 1만 4143㎡로 경주시에서 관리하며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묘역에는 김유신장군의 위패를 모신 금산재의 비각이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2길 44-7
강경역사문화안내소(구 강경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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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시역사관광

강경역사문화안내소(구 강경노동조합)

구 강경노동조합은 1925년에 건립된 근대 건축물이다. 강경은 금강을 거쳐 서해와 연결되고, 내륙으로도 접근하기 쉬워 일찍부터 상권이 발달한 도시이다. 그러한 이유로 강경시장은 평양,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으로 손꼽혔으며, 강경포구는 원산포구와 함께 전국 2대 포구로 불릴 만큼 각종 해산물과 공산품의 거래 및 이동이 활발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창구로써 1920년대에 이르러 내륙의 수산물 유통은 대부분 강경포구를 거쳐 전국으로 운송될 만큼 번성하였다. 당시 강경노동조합은 조합원의 수가 2,000~3,000명에 달하였고, 하루 약 200여 척의 배가 하역 작업을 할 만큼 활성화되었다. 강경노동조합 건물은 1925년 당시 조합장인 정흥섭이 개인 재산 5,000원을 들여 한식 목조건물로 조합 사무실을 지은 다음, 같은 해 10월 3일에 완공하였다. 당시 건물은 바닥 면적 70.08㎡의 2층 구조로 연면적 140.16㎡ 규모였고,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1층 전체를 개방하여 사무공간으로 사용하였다. 강경노동조합은 1953년에 전국부두노동조합 강경지부 연맹체제로 바뀌었고, 이후 강경연락소로 축소되었다가 결국 해체되었다. 강경노동조합 건물도 1935년 이후 본래 용도와 상관없이 공장, 창고 등으로 사용되었는데, 1940년대 사진 자료를 보면 건물 모습이 현재와 같은 단층 구조로 바뀌게 된다. 이는 노동조합의 쇠락과 연관 지어 이해할 수 있다. 강경노동조합은 국가등록문화유산인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 강경 갑문, 강경 채운산배수지 등과 함께 근대 강경의 번성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이다.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옥녀봉로27번길 30-5
강경 중앙초등학교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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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시역사관광

강경 중앙초등학교 강당

강경 중앙초등학교 강당은 1930년대에 붉은 벽돌을 쌓아서 만든 건축물이다. 강경중앙초등학교는 논산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학교이자 졸업생 기수로 충남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이다. 1905년 4월 2일에 2년제 사립학교인 보명학교로 개교한 이래, 1907년 4년제 강경공립보통학교, 1938년 강경중정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강경중정공립국민학교, 1946년 강경중앙초등학교로 여러 차례 학교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당은 1937년 6월 30일에 세워진 지상 1층의 건물이다. 이 건물은 강경공립보통학교 개교 30주년을 기념하여 강경공립보통학교 후원회에서 기증한 것이다. 콘크리트 기초 위에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지었고, 외벽 둘레에는 콘크리트로 흰색 띠를 둘러 두 층높이로 나누고, 모서리에는 벽돌 내어쌓기 방식으로 띠를 둘렀다. 이 건물은 당시 강당 건축의 전형적인 특징을 따르는데, 건물에 흰색 띠를 둘러 입면의 단조로움을 없애 단아한 멋을 보여준다.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옥녀봉로 8
강경 구 연수당 건재 약방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충청남도 논산시역사관광

강경 구 연수당 건재 약방

강경 구 연수당 건재 약방은 1920년대 강경시장 전경 사진 중에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강경의 하시장(下市場)을 중심으로 했던 번성시기에 시장 중심에 위치하여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건축당시 ‘남일당(南一堂) 한약방’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건축주가 바뀌면서 ‘연수당 건재 대약방(延壽堂 乾材 大藥房)’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운영되었고, 현재는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 지상 2층 규모의 한식 목조 건물로 지붕은 우진각 기와지붕이며, 지붕내부의 상량문을 통해 1923년(癸亥年 八月 五日 酉時 立柱上梁)에 준공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건물은 근대 한옥 변천사적으로 가치가 높다.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옥녀봉로24번길 12-1
개평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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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함양군역사관광

개평한옥마을

함양의 중심에 위치한 개평한옥마을은 좌안동 우함양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유학자들 배출한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선비마을로 조선조 오현 중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 그리고 초계 정씨 3개 가문이 오래도록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면서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일두 정여창 선생, 옥계 노진 선생 등 역사적 위상이 높은 선생을 배출하였다. 개평마을은 일두고택(국가민속문화유산)을 비롯한 많은 전통가옥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선조들이 풍류를 즐겼던 교수정(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일두선생의 명상의 장소였던 개평리소나무군락지(경상남도 자연유산) 등 조상의 의식주와 생활풍습 등을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자원이 많이 남아있어 민속자료로써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길 59
강천사(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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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역사관광

강천사(제천)

학이 둥지를 튼다는 송학산에 자리 잡은 제천의 강천사는 송학산 정상 바로 아래에 자리하였으며 천혜의 비경을 품은 명당으로 한번 가본 사람은 산사에서 바라보는 절경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송학초등학교에서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소악사지가 나오며 그 위에 강천사가 자리하고 있다. 강천사에는 조선 후기 불상인 강천사 목조 보살 좌상 및 복장 유물이 봉안되어 있는데 복장물을 매납한 이후 한 번도 개봉된 바 없는 상태로, 복장물의 종류와 구성을 온전하게 살펴볼 수 있는 드문 사례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옥천3길 56-10
거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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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천시역사관광

거동사

거동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로 보현산에 위치해 있다. 신라 시대 의상대사(625~702)이 창건하였다 하며, 창건 이후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거동사 주변에는 사찰 흔적들이 남아 있어 과거에 매우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내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2동의 요사, 산신각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거동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는 건물로 옛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다.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사곡길 77-81
감천사(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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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역사관광

감천사(부산)

감천사는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지하 암반에서 1년 내내 물이 솟아올라 인근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하였다는 설이 있는 곳이다. 감천사는 부산 연제구 연산동 묘봉산 자락에 위치한 자그마한 비구니 스님의 수행도량이다. 연제구의 주산인 배산 서쪽 묘봉산의 완만한 능선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중생들의 목마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원력으로 창건된 탓에 연산동 주거단지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감천사의 물맛은 연제구청에서 공인한 연산동 약숫물로도 유명세를 떨치고 있어 주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 도심사찰로 이름나 있다. 또한, 부산의 대표적 도심 포교도량인 혜원정사와 좁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위치한 감천사는 약숫물 외에도 대웅전에 모셔진 관세음보살의 기도성취가 크다 하여 관음기도도량으로도 이름 높다. 비록 사세가 작고 창건의 역사 또한 짧지만 기도객들의 입소문으로 널리 알려졌다.

부산광역시 연제구 묘봉산로 40
감응사(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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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성주군역사관광

감응사(성주)

감응사는 신라 애장왕(재위 800~808) 3년에 건립한 사찰이다.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어 있는 성주 한개마을의 뒤쪽 영취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사찰의 창건과 관련해서 창건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신라 제40대 애장왕이 늘그막에 왕자를 낳았는데 날 때부터 눈이 나빠 앞을 볼 수 없었다. 온갖 약을 다 써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는데, 어느 날 꿈에 나타난 스님의 말을 듣고 독수리가 날아가 앉은 이곳의 약수로 왕자의 눈을 씻게 하자 왕자가 앞을 볼 수 있었다 한다. 애장왕은 이를 부처의 은덕으로 여겨 승려 체징으로 하여금 사찰을 건립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또한 사찰이 있는 산 이름을 신령스러운 독수리산이라는 뜻에서 영취산이라 부르게 하였다. 처음 절 이름을 감은사라 하였다가 후에 감응암, 감응사라 개칭하였다. 감응사는 창건 후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숙종 2년(1675)에 중창하였고, 그 후로도 영·정조대에 중수가 있었다. 지금의 불우는 1970년 주지였던 평타스님이 신도들의 도움을 받아 세워진 것들이다. 대웅전 뒤편 암벽 하단에는 약수가 솟는 옥류정이 있고, 주위 암벽에는 각자가 많이 새겨져 있다. 약수 상단에 부조의 용왕상이 새겨져 있으며, 여타 사찰에서 삼성각에 칠성신, 독성, 산신을 모시는데 반해 감응사에서는 독성존자 대신에 용왕신을 모시고 있다.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1길 234
가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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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역사관광

가섭사

가섭사는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중 하나인 가섭존자의 이름을 딴 고려 후기의 사찰이다. 가섭존자는 두타행을 가장 충실히 실천하였고, 영취산에서 석가모니 부처가 연꽃을 들어 그 의미를 물었을 때 유일하게 미소로 답하여 염화미소의 가르침을 전한 인물이다. 가섭사는 창건 사실을 기록한 문헌 기록과 관련 유물이 현존하지 않으며, 다만 조선시대의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실상을 추정할 뿐이다. 가섭사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와가의 극락보전과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삼성각, 그리고 콘크리트로 만든 요사채 1동이 있다. 극락보전 안에는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주존으로 하는 삼존불이 있는데, 협시불은 관세음보살 좌상과 지장보살 좌상으로 1975년에 만들어졌다. 가섭산 정상 아래에 자리한 가섭사는 조용하고 아담한 산사가 무척 아름다우며 산사 곳곳의 풍경이 무척이나 고즈넉한 곳이다. 음성을 여행하며 가볼 만한 사찰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가섭길 494
가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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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옥천군역사관광

가산사

가산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과 의승군이 활동했던 사찰 가산사는 신라시대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가산사는 임진왜란 당시 풍전등화와 같은 민족을 구하기 위해 많은 의승군과 의병이 훈련했던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의병장들로는 곽재우, 고경명, 정문부, 조헌 등이 있고, 의승군으로는 서산, 사명, 영규, 처영, 신열, 법정 스님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영규대사는 서산대사가 승군의 총책임을 맡기 전 자발적으로 승군을 조직한 최초의 승장이다. 가산사 일대는 영규대사와 조헌 선생이 의승군과 의병을 훈련하고 군영으로 사용했던 곳으로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청주성 탈환에 큰 공헌을 한 영규대사와 조헌 선생은 금산의 연곤평전투에서 순절했는데 국가에서는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가산사를 호국사찰로 지정하고 진영을 봉안하여 제향을 올리게 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될 것을 염려한 조선총독부는 그간 전해오던 두 의병장의 영정을 강탈하고 불온사찰이라 지목하여 가산사를 탄압하기도 했다. 오늘날 옥천군에서는 국난극복에 앞장섰던 충의열사들을 위해 해마다 가산사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안내회남로 671
갑곶순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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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군역사관광

갑곶순교성지

1866년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프랑스 함대가 갑곶 돈대로 상륙했다.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혹독한 박해가 시작됐고 갑곶 성지가 보이는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또 1871년에는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 등이 갑곶 진두에서 순교했다. 후에 천주교 인천 교구는 갑곶 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지금의 갑곶 순교성지를 조성하고 2004년 2월 10일 갑곶 순교성지 첫 미사를 드렸다. 강화도 성지로 일만 위 순교자 현양 동산, 진무영(鎭武營) 순교성지, 관청리 형방이 있으며, 십자가의 길, 순교자 삼위비, 박순집 베드로 묘 등을 순례할 수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1366번길 35
강화 오상리 고인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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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군역사관광

강화 오상리 고인돌군

오상리 고인돌군에서는 모두 12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데, 2000년 실시된 발굴조사에 의하면 모두 북방식 고인돌이라 한다. 이 지역의 고인돌은 덮개돌은 부분적으로 손질한 흔적이 있고, 평면 형태는 모두 판돌형(板石形)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기념물로 지정된 내가 고인돌이 가장 크고 나머지는 길이가 다양한 편이다. 돌방(石室)은 돌널형태의 모습이고, 고임돌이나 막음돌을 세울 때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주변에 쐐기돌을 사용하였다. 돌방의 바닥은 거의 대부분 맨바닥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고인돌은 판돌이나 깬돌 ‘할석’이 깔려 있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오상리
거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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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천시역사관광

거조사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인 거조사는 738년(신라 효성왕 2) 원참(元旵)법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경덕왕 때 왕명으로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뒤 진평왕 13년 혜림법사와 법화화상이 영산전을 건립하여 오백나한을 모신 영험 있는 도량으로 유명해졌다. 거조사 영산전은 국보 제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려 우왕원년(1375)에 지어졌다. 상언이 그린 영산회상도와 청화화상이 자연석을 이용해 조성한 석가모니부처님, 제화갈라보살, 마륵보살님과 비롯한 526분의 나한성중이 봉안되어 있다.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거조길 400-67
개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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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금산군역사관광

개덕사

개덕사는 충남 금산군 추부면에 있다. 서대산 기슭에 터를 잡은 이곳은 자세한 기록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한다. 개덕사 인근 절터에서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기와 조각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사찰에서는 서대폭포 혹은 개덕폭포라 불리는 폭포를 비롯해 대웅전, 산신각 등을 볼 수 있다. 사찰 주변에는 서대산드림리조트가 있다.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개덕사길 83
강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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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영동군역사관광

강선대

양산팔경 중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곳이 바로 강선대이다. 강선대는 유유히 흐르는 금강가에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오롯이 서 있는 육각 정자로 멀리서 보면 주변 노송들과 어울려 우아하고 고상한 멋이 흐른다. 정자 위에 서면 푸른 강물이 거칠게 부딪치는 바위 절벽이 아찔하다. 강선대는 물과 바위와 소나무가 어울려 삼합을 이룬 곳이라고도 한다. 양기(陽氣) 강한 바위와 음기(陰氣)의 물을 소나무가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서다. 조선의 이안눌과 『한우가』로 유명한 임제의 시가 정자 안에 걸려 있어 풍류를 더한다.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 756-1
감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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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역사관광

감추사

감추사는 동해시 용정동에 위치한 작은 절이다. 영동선의 철길을 건너 옥석정이라는 정자를 지나고 나서 계단을 내려오면 기도도량 옆에 석굴과 감추사가 있다. 건물은 4채밖에 없지만, 저마다 바위 틈새에 교묘하게 들어앉아 있어 각각 멋진 모습을 내비친다. 바닷가에 들어선 절은 대부분 기도처로 유명한 관음도량으로, 바닷가에 관음보살이 상주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곳에서 관음기도와 용왕기도를 올리면 집안의 안녕과 사업이 번창한다고 해서 전국 각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또한 동해 바다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속설도 있어 해마다 해돋이 여행으로 오는 관광객들도 많다. 감추사의 절 입구에는 5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석탑은 한 여신도가 죽을 때 자신의 아들에게 유언을 남겨 만들어진 석탑이라고 한다. 바닷가에서 가깝기 때문에 주변에 기암절벽이 환상적으로 멋진 절경을 이루고 있다. 절 입구 샘물에서는 약수가 흘러넘쳐 늘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수중지수라 하여 수명을 감로수라 지었다. 마을에서는 가뭄이 심할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리며 뜻을 기리고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해안로 120 (용정동)
강릉 오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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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역사관광

강릉 오금집

강릉 오금집은 강릉시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유일한 초가집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이다. 집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겹집이다. 왼쪽으로 2개의 방이 있으며, 오른쪽으로 부엌이 있다. 겹집양식으로 뒤쪽에 안방과 골방을 배치하였고, 앞쪽에는 툇마루가 있다. 네 귀퉁이에 있는 기둥은 안으로 기울어지도록 세웠으며, 못을 사용하지 않고 이음·새끼줄 등을 이용하였다. 특히 부엌 쪽은 초가지붕이 땅 가까이까지 내려와 있다. 흙벽으로 되어있고 목재의 가공 등이 거친 편이다. 흙과 돌로 된 담이 집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평면 양식은 田자에 가깝지만 움집과 같은 느낌을 주는 특이한 집으로,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옛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강릉대로210번길 23-9 (임당동)
강진 백운동별서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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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 강진군역사관광

강진 백운동별서정원

조선중기 처사 이담로(聃老, 1627~1701)가 들어와 계곡 옆 바위에 ‘백운동(白雲洞)’이라 새기고 조영(造營)한 원림으로,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배합된 배치와 짜임새 있는 구성을 이루며 우리 전통 원림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별서이다. 백운동이란 ‘월출산에서 흘러 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약사암과 백운암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월출산 능선의 기암괴석의 바위들이 보이는 이곳에 전형적인 호남전통원림의 형태를 띄고 있으며, 마침 이곳길도 해남부터 시작하는 삼남길이 지나는 길이기도 하다. 현재의 건물은 다산선생이 1812년 이곳을 다녀간 뒤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제자 초의선사에게 를 그리게 하고 백운동 원림의 12승경을 노래한 시문을 남겼는데 이를 근거로 호남의 유서깊은 전통별서의 모습을 재현하게 되었다. 이담로는 옥판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그냥 떠나보내기 아쉬워 아홉 굽이 유상곡수를 만들고 정자를 앉혔는데, 꽃과 나무가 어우러지는 계곡에 눈이 머물다가 봉우리로 시선을 옮기며 경치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백운동 계곡은 강진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담양 소쇄원, 완도 보길도의 세연정 등과 함께 호남의 3대 정원으로 일컬으며 조선중기 선비들의 은거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출처:강진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강진군 성전면 월하안운길 100-63
강화 서도 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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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군역사관광

강화 서도 중앙교회

강화도는 19세기 말 조선이 문호를 개방할 때 지리적 여건으로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은 탓에 서양인들의 선교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당시에 세워진 교회 중 지금까지 강화도에 남아있는 것만 세 곳에 이른다. 1900년에 세운 성공회 강화 성당, 1906년에 세워진 강화 온수리 성공회 교회 그리고 서도 중앙 교회가 현존하고 있는 당시의 교회들이다. 그 중 서도 중앙 교회는 1923년 교인들의 건축 헌금으로 지어지기 시작해 7월에 완공된 한옥 예배당이다. 1978년 주문 교회에서 서도 중앙 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건물 내부는 중세 전기의 서양 교회 양식을 하고 있지만 매우 단순하여 예배실로 쓰이는 좁은 신랑과 측랑, 중앙의 강단으로만 구성돼 있다. 전면에는 강단 위에 설교대를 두었으며, 바닥은 마루를 깔았다. 이 건축물은 우리 전통 목조건물의 가구 형식을 바탕으로 서양 교회를 지었다는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으면서 지금도 종교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서도면 주문도길 256-1
갈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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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고성군역사관광

갈천서원

갈천서원은 고려 공민왕 때 문신인 문정공 행촌 이암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이다. 이암 선생(1297~1364)은 고려 충선왕 5년(1313) 문과에 급제하였고, 공민왕 12년(1363)에는 1등 공신으로 철성부원군에 봉해지기도 했다. 갈천서원은 고려 공민왕 때 회화면에 금봉서원으로 세워졌으며, 조선 숙종 38년(1712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우고, 갈천서원이라 하였다. 고종 6년(1869)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광복 후 유림들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남아있는 건물로는 사우, 강당, 내삼문과 정문인 불사문이 있고, 사우에는 행촌 이암, 묵제 여필, 관포 어득강, 도촌 이숭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강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3량 구조의 팔작지붕 목조 와가로, 가운데 1칸을 대청으로 하고, 좌우에 방 1칸을 두고 우측 방 앞에 누마루가 있다. 정문인 불사문은 앞면 5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 솟을대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가운데 1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갈천로 620
가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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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역사관광

가호서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정문부를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함북에 있는 네 개의 사우에 향사하였다가 1970년에 진주 향교 사람들의 공의와 후손들의 협찬에 의해 현 위치에 사우를 건립하였다. 그 후에 서원 내에 정문부 장군 유물전시관도 건립되었다. 충의공 농포 정문부(1565~1624)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85년(선조 18) 생원이 되고 1588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한성부참군이 되었다. 1590년 사헌부 지평으로 지제교를 겸했으며 함경북도 병마평사가 되어 북변의 여러 진을 순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조직하여 장덕산 전투, 쌍포 전투, 백탑교 전투에서 대승하여 관북 지방을 수복하였다. 시화에 연루되어 억울한 죽임을 당했으나 후에 복권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서원에는 가호서원, 충의사, 유물전시관, 보조묘, 장판각, 북관대첩비, 농포정문부사적비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이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길 59-2
강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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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 강진군역사관광

강덕사

강덕사는 강덕서원이라고도 한다. 조선 헌종 12년(1846)에 후손들의 협력으로 시조 장경공 최사전을 비롯하여 최표, 최부, 최극충을 배향하고 있다. 최사전은 어려서부터 무술에 정통하여 여러 대에 걸쳐 임금을 섬기던 중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의 난을 평정하여 나라를 보존시켜 강진의 명예를 드높인 인물이다. 경내에는 외삼문, 내삼문, 강덕서원, 효인재, 강덕사 묘정비, 위패를 모시는 강덕사, 관세위, 망예위 등이 현존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5일과 10월 15일에 제를 올리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강진군 군동면 호라길 199-39
가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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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 장성군역사관광

가산서원

가산서원은 고려 후기 문신 익재 이제현(1287∼1367)과 이제현의 8대손인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 백사 이항복(1556~1618)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연산군 4년(1498) 이제현의 5대손인 장수 현감 이재인(1415~?)이 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 백산촌에 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익재의 영정을 모셨고, 1559년 후손 이대정이 사우 백산사를 지어 익재의 제사를 모셨다. 세월이 흘러 사우가 퇴락하자 영조 42년(1766) 후손 이언경이 낭월산 남쪽 기슭의 현 위치(장성군 삼서면 홍정리 가산마을)로 사당을 옮겨 가산서원이라 하고 이항복을 추배하였다. 고종 5년(1868) 훼철되어 영정만 모시는 영당으로 남았다가 1960년 중건하였다. 1998년 장성향교의 발의로 이재인을 추배하고, 해마다 음력 8월 10일에 향사를 올린다. 익재영정이 보관되어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장성군 삼서면 영장로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