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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산성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경상북도 상주시역사관광

견훤산성

산의 정상부를 따라 축조한 산성으로, 견훤이 쌓았다 하여 견훤산성이라 불린다. 이 산성뿐만 아니라 상주지역의 옛 성들이 견훤과의 관계는 삼국사기에 견훤과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상주 출신이란 기록 때문이다. 견훤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신라의 장군으로 있다가 이곳에서 군사를 양성하여, 신라 진성여왕 6년(892)에 반기를 들고 신라의 여러 성을 침공하다가 효공왕 4년(900)에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이 산성은 대체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산세와 지형을 따라 암벽은 암벽대로 이용하고, 성벽을 쌓을 필요가 있는 곳에만 성을 쌓았기 때문에 천연 절벽과 성벽이 조화를 이룬다. 성의 4모서리에는 굽이지게 곡성을 쌓았는데, 동북쪽과 동남쪽으로 난 2곳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다. 보은의 삼년산성(사적)과 쌓은 방법이 비슷한데, 정교하게 쌓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삼국시대 산성의 하나이다. 견훤산성 주변을 1시간 정도 가볍게 돌아볼 수도 있으며 백두대간 길을 이어 헬기장, 문장대까지 이어지는 속리산 등산 코스도 있다.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경주 인왕동 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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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인왕동 사지

경주 인왕동 사지는 인용사의 터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용사는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629~694)의 안녕을 비는 절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는 신라까지 정벌하려 하면서 당에 머물고 있던 김인문을 감옥에 가두었다. 신라 사람들은 그의 귀국을 기원하며 관음도량을 열었으나, 효소왕 3년(694)에 김인문이 귀국하던 중에 죽자 그의 극락왕생을 빌며 미타도량으로 바꾸었다. 인용사는 신라에서 승려나 왕이 아닌 개인을 위해 세운 최초의 사찰로서 당시 신앙의 형태를 보여준다. 2002년~2011년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4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하였다. 신라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로, 유례가 드문 亞자형 건물 터를 비롯하여 탑지, 금당지, 강당지, 회랑지, 연지와 우물 등이 확인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경주 금척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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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금척리 고분군

경주 근교 금척리 평지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로, 크고 작은 30 여기의 무덤이 모여 있다. 이곳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받은 금으로 만든 자(금자)를 숨기기 위해서 40여 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으로 지금도 이 무덤들 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 전한다. 본격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1952년에 파괴된 무덤 2기를 조사하였다. 무덤 내부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덧널(곽)을 설치한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유물은 금귀고리와 굽은 옥 등이 수습되었다. 이곳의 무덤들은 모두 경주시내의 평지 무덤들보다 규모가 작아 신라의 낮은 귀족들의 무덤으로 짐작된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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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경주 벽도산의 서쪽을 향한 바위에 삼존불[三尊佛]을 조각한 마애불[磨崖佛]이다. 이 불상은 가까운 곳에 있는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서방 극락세계를 다스린다는 아미타불을 가운데에 새기고, 양쪽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새겼다. 아미타불의 머리는 아주 큼직하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낮게 있어 모자를 쓴 듯한데, 이는 굴불사지의 석조사면불상과 같은 양식이다. 얼굴은 볼에 살이 올라서 매우 풍만하게 보이며 미소가 남아 있다. 어깨는 넓고 반듯하며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얇게 표현되어 몸의 굴곡을 잘 드러낸다. 오른손은 내리고 있고 왼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어서, 이 불상이 아미타불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발은 앞으로 내민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 옆으로 반듯하게 벌리고 있다. 왼쪽의 보살은 풍만한 본존상에 비해 날씬한 여성미를 강조하고 있다. 몸의 굴곡이 여실히 드러나 있으며, 발은 역시 옆으로 벌리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 위에까지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왼손에는 보병[寶甁]을 들고 있다. 이러한 손모양을 통해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인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의 보살상 또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또 다른 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이다. 이 불상들의 머리 뒤에는 모두 둥근 선으로 머리광배가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경주 굴불사지석조사면불상과 기본적으로는 같지만, 풍만성이나 발의 모양, 옷주름의 모양 등으로 보아 제작 시기가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두대안길 69 (율동)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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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은 경주 굴불사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바위 불상으로 약 높이 3미터의 바위 네 면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서 사면석불이라 부른다. 이 사면불의 서쪽은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삼존불, 동쪽은 유리광세계의 약사여래불, 북쪽은 미륵불, 남쪽은 석가모니불을 각각 새긴 사방불의 형태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땅을 파보니 이 바위가 나와서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 기록만으로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이때쯤 불상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은 불상조각에 있어 입체의 표현, 음각과 양각의 표현, 좌상과 입상의 표현 등을 변화 있게 배치해 매우 특색이 있으며 풍만하고 부드러우면서 생기를 잃지 않은 솜씨를 볼 때 통일신라 초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산업로 4214-76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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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골굴암의 높은 암벽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만든 12개의 석굴 중 가장 윗부분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이다. 조선시대 겸재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에는 목조전실이 묘사되었으나 지금은 바위에 흔적만 남아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가늘어진 눈, 작은 입, 좁고 긴 코 등의 표현에서 이전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해 평면적인 신체는 어깨가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게 표현되었는데,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겨드랑이 사이에는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가 있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광배와 불상 둘레의 율동적인 불꽃무늬를 통해 흔적을 살필 수 있다. 평면적인 신체와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의 옷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U자형 옷주름 등이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와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기림로 101-5
경주 동방동 와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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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동방동 와요지

경주 동방동 와요지는 1977년 택지 조성공사 도중에 우연히 발견된 가마터로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발굴조사하여 9기의 도자기와 기와를 굽던 가마터를 발굴하였다. 그중 1기를 조사한 결과 가마의 전체 길이는 10.5m, 넓이 1.72m인 구릉 경사면을 이용하여 만든 굴가마(등요)로 밝혀졌다. 도자기를 굽던 곳의 천장 부분 벽 일부가 남아있으며, 도자기를 빚던 곳과 굽던 방 사이에는 높은 벽이 있다. 출토된 기왓조각은 고려시대에 성행한 새 깃털 모양 무늬와 연꽃무늬의 장식 기와, 그리고 조선시대에 제작된 기와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마바닥에서 출토된 건륭이 새겨진 암막새는 가마터가 없어질 당시의 것으로 생각되며, 가마터의 제작시기를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로 추정하게 한다. 가마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토기와 기와를 만들 수 있는 양질의 흙과 물, 그리고 구워내기 위한 연료가 필요한데 이곳 동방동 일대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교통로가 있어 운반도 용이하였기에 오랜 시간 도자기 생산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동방동
경주 재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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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재매정

경주 재매정은 신라의 김유신 장군 집에 있던 우물이다.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이 일대가 장군의 집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김유신 장군이 오랜 기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돌아오다가 다시 전쟁터로 떠날 때, 자신의 집 앞을 지나면서 가족들을 보지도 않고 우물물을 떠 오게 하여 말위에서 마시고는,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하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93년 발굴조사에서 재매정을 중심으로 사방 70m 지역을 발굴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5.7m이며, 가장 넓은 부분은 1.8m이고, 바닥의 지름이 1.2m로 벽돌같이 다듬은 돌로 만들었다. 우물 옆에 비각이 있고 비각안에 조선 고종 9년(1872)에 이만운이 쓴 비석이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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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신라시대의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석불좌상으로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한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에서는 은은하게 내면적인 웃음이 번지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힘없이 축 늘어진 느낌이며, 군데군데 평행한 옷주름을 새겨 넣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대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인데 다소 연약해 보인다. 불상과는 별도로 마련해 놓은 광배(光背)는 매우 장식적인데, 광배 안에는 작은 부처와 보상화·덩쿨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특히 광배 뒷면에는 모든 질병을 구제한다는 약사여래불을 가느다란 선으로 새겨 놓았는데, 이러한 형식은 밀양 무봉사나 경북대 광배 등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예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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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경주 남산 이 일대는 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남쪽의 큰 바위에는 목조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석탑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남쪽면의 불상을 주존으로 하여 남향 사찰을 경영했었음을 알 수 있다. 9m나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에 여러 불상을 회화적으로 묘사하였다. 남쪽 바위면에는 삼존과 독립된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고, 동쪽 바위면에도 불상과 보살, 승려, 그리고 비천상을 표현해 놓았다. 불상, 보살상 등은 모두 연꽃무늬를 조각한 대좌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 한 광배를 갖추었으며 자세와 표정이 각기 다르다. 비천상은 하늘을 날고 승려는 불상과 보살에게 공양하는 자세이지만, 모두 마멸이 심해 자세한 조각 수법은 알 수 없다. 서쪽 바위면에는 석가가 그 아래에 앉아서 도를 깨쳤다는 나무인 보리수 두 그루와 여래상이 있다. 하나의 바위면에 불상·비천·보살·승려·탑 등 다양한 모습들을 정성을 다하여 조각한 것은 장인의 머릿속에 불교의 세계를 그리려는 뜻이 역력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조각 양식은 많이 도식화되었으나 화려한 조각을 회화적으로 배치하여 보여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특이한 것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탑골길 36 (배반동)
경성 부민관 폭탄 의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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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중구역사관광

경성 부민관 폭탄 의거지

경성 부민관 폭탄 의거지는 경성부민관에서 친일파가 주도하는 대회를 방해하기 위해 폭탄을 터트린 곳이다. 1945년 7월 24일 경성부민관 폭탄 의거 경성부민관은 1935년 12월 태평동 60번지에 세워진 경성부의 부립극장으로 오늘날로 하면 시립극장이다. 경성부민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에 대강당·중강당·소강당·담화실 등을 갖춘 다목적 회관으로서 당시로는 드물게 냉난방 시설과 조명·음향시설을 갖추어 각종 극단의 공연은 물론 전시 총동원 체제 아래 각종 관변 집회의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 경성부민관 폭탄의거를 주도한 조문기·유만수·우동학·강윤국 등 당시 20세 안팎의 열혈 청년들은 1945년 5월 서울 종로구 관수동 13번지 유만수의 집에서 대한애국청년당을 결성하고 항일투쟁의 기회를 엿보았다. 1945년 7월 24일 저녁 경성부민관에서 친일파 거두인 대의당의 박춘금 일당이 주최하는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린다는 보도가 나오자 조문기 등은 비밀회합을 갖고 대회장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유만수가 수색변전소 공사장 발파 인부로 침투해 빼낸 다이너마이트로 사제폭탄 두 개를 만들어 대회 전날 밤 대회장 뒤편 화장실 쪽에 설치하였다. 폭탄은 대회 당일인 7월 24일 밤 9시경 박춘금이 시국 강연을 위해 등단하고 얼마 뒤에 터졌고 그것으로 대회는 중단되고 말았다. 경성부민관 폭탄의거는 해방을 한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기에 꺾일 줄 모르는 민족의 독립 의지를 안팎에 떨친 사건이었다. 현재는 서울시의회 부지로 폭탄의거지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25 (태평로1가)
경양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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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김천시역사관광

경양서원

김천시 구성면에 위치한 경양서원은 송오 여응구와 그의 아들 감호 여대로 부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 하기 위해 지은 서원이다. 서원 건물 오른쪽에 사당이 있는데 철폐 이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옛날과 같이 두 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여응구는 157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론을 지냈으며, 여대로는 158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에 이르고 임진왜란 때 창의지사였다. 경양서원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94년 「금릉군지」에는 조선 숙종 때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68년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자 사당 건물은 철거하고 강당은 그대로 둔 채 현판을 ‘경양서원’에서 ‘경양서당’으로 변경하였다. 이는 서원 철폐령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 건물이며, 강당 건물의 기둥은 대추나무와 밤나무를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는 「송오문집」과 「감호문집」 판목이 보존되어 있다.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광명3길 105
경광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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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역사관광

경광서원

금계리 동편 사천 위에는 예로부터 ‘유정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선조 1년(1568)에 사림에 의해 경광서원이 세워졌다. 이후 현종 3년(1662)에는 이름을 ‘경광정사’로 바꾸고, 백죽당 배상지와 용재 이종준 두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인조 27년(1649)에는 ‘춘파이사’를 창건하여 용재 이종준과 경당 장흥효 두 선생을 모셨다. 숙종 12년(1687)에는 서원으로 승격되어 경당 선생의 위패를 경광정사로 옮기고, 백죽당과 용재 두 선생과 함께 제향 하였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873년 단소를 마련하여 향사를 이어왔다. 이후 1978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설 되어, 매년 9월 중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3길 131-24
겸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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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 순천시역사관광

겸천서원

겸천서원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서원이다. 조유(趙瑜)·조숭문(趙崇文)·조철산((趙哲山) 등 옥천조씨 3세를 배향했다. 순천을 관향으로 하는 단종의 충신인 김종서(金宗瑞)·박중림(朴仲林)·박팽년(朴彭年)도 함께 배향되었다. 겸천서원은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당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었고, 주위에 고직사, 유사방 건물이 있다. 주변과 경내에는 영모재, 조유의 효자정려비각, 조숭문과 조철산의 충신정려각, 입구의 문 ‘경재문(景梓門)’, ‘경장각’, 경장각창건기적비 ‘계해’, 겸천서원중건기적비, 모선헌성비 ‘병오’ 등이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
검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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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역사관광

검계서원

검계서원은 고려말 4대 왕을 보필한 충신 문효공 전신이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서원 안에는 양현사와 천안 전 씨 시조 단소 및 재실, 양현사의 뒤쪽에는 천안 전 씨의 시조묘가 있고, 그 앞으로 좌우에 전신의 부친인 전승과 전신의 단소가 있으며 그 옆으로 설단비가 서 있다. 단소 아래는 전 씨 시조 사당인 충훈사와 양현사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으며, 각각의 사우 앞에는 삼문이 설치되어 있다. 양현 사는 고려 후기의 문신인 문효공 전신(1276~1339)과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천안 전 씨 전득 중의 사위인 이협(1583~1665)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매년 음력으로 3월 10일에는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모여 선현들의 얼을 선양하고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을 위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 또한 천안시의 보호수인 300년 된 모과나무가 있으며 주변에는 영산홍 꽃이 만발하며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금호1길 117-10
검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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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역사관광

검암서원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에 있는 조선 후기 조헌을 비롯한 9인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조헌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이며 의병장이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여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많은 관직을 거쳤으나 직언을 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과 함께 나라를 위해 싸우기도 하였으며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인물이다. 조선 현종 2년(1661) 지방 유림의 공의로 조헌을 주향하고 별좌 한일휴, 참봉 신지익, 찰방 송국헌, 의민공 연최적, 부사 지여해, 사우당 이동형, 도사 변상회, 병암 신영식, 범촌 박문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폐되었다가 광복 뒤 지방 유림이 관계 기관의 도움을 받아 1958년에 복원하였으며, 1960년에 중수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 중앙의 신문과 양옆의 협문 등이 있다. 사우에는 조헌을 주벽으로 10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병암리 215-2
거창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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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역사관광

거창향교

1415년에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이후 대성전을 설립하고 1572년에 현감 서의가 중건하였으며, 1574년에는 현감 장문한이 명륜당을 건립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23년에 대성전을 중건하고 1714년에는 현감 김시빈이 대성전 앞에 춘풍루를 건립하였다. 1748년에 도유사 김천분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809년에 도유사 이상조가 중건하였다. 1840년에 도유사 이준옥과 재임 변윤석, 어재의 등이 협의하여 동재와 서재를 중수하였으며, 1799년에는 부사 이성이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중수하였다. 그 뒤 1948년 군정법령에 의해 향교의 재산이 향교재단으로 귀속되고 1950년의 농지개혁법으로 전답이 분배되어 계속 황폐해지다가 1974년 향교직제에 따라 중건 및 보수가 시작되어 1976년 전면 복원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전답과 노비, 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초하루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성산길 34
경산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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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산시역사관광

경산향교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경산향교는 고려 공민왕 2년(1390) 옥곡동에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여러 차례 다시 세웠는데 조선 숙종 7년(1681) 신교동을 거쳐, 현재의 위치로 이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향교에 모시던 위패가 위험해지자 향교의 종이었던 강개명이 성암산 동굴로 옮겨 놓아 무사했다고 한다.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앞에 두고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뒤쪽에 둔 전묘후학의 배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경상북도 경산시 향교길 14-19 (중방동)
경북 청송 주왕산면·파천면 [슬로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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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청송군역사관광

경북 청송 주왕산면·파천면 [슬로시티]

백두대간 오지 중의 오지 경북 청송이 2011년 6월 25일 슬로시티로 선정되었다. 슬로시티(Slow City)는 느리게 살기 미학을 추구하는 도시를 가리키며 빠른 속도와 생산성만을 강요하는 빠른 사회(Fast City)에서 벗어나 자연·환경·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여유 있고 즐겁게 살자는 취지로 시작되었으며 전통 보존, 지역민 중심, 생태주의 등 이른바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마을을 의미한다. 청송 파천면에는 대표적인 두 개의 마을이 있다. 하나는 청도 덕천마을로 청송 심씨의 집성촌이며 총 7채의 고택이 있고, 다른 한 곳은 한옥의 정취와 옛 선비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중평 선비마을이다. 두 마을 모두 수려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조선시대 가옥이 남아 있는 고즈넉한 마을이다.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한 문화 체험과 한옥스테이를 진행하고 있고, 비용은 별도 문의해야 한다.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이전앞길 1
결성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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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홍성군역사관광

결성동헌

조선시대 홍성지방 관리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행정업무를 처리하던 동헌과 치안업무를 처리하던 형방청, 책과 문서를 보관하면서 관리의 자제가 지내던 책실로 구성되어 있다. 동헌은 고려말에 결성면 금곡리 분우터에 있다가 정종 2년(1400)에 결성읍 산성 정상으로 옮겼다. 현종 6년(1665) 현재의 위치인 읍내리에 다시 지었고,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동헌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형방청은 ‘ㄱ’ 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책실은 앞면 2칸·옆면 1칸 반 크기로,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인 우진각지붕이다.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홍남서로738번길 23
경주 성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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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성덕왕릉

경주에서 불국사 방향으로 가는 길의 동남쪽 구릉 소나무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1~737)의 무덤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본명은 융기이다. 당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37년에 왕이 죽자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 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왕릉 북쪽에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왕릉의 밑둘레는 46m, 높이는 5m이다. 무덤 아랫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는데, 높이 90㎝ 정도의 돌(면석)을 두르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의 조각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무덤 앞쪽에는 석상이 놓여있고 무덤 주위의 4모서리에는 돌사자를 배치하였다. 석상 앞쪽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 각 1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무인석 1개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石人) 1개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에서 보이고 있는 석물의 사실적인 조각기법은 통일신라 초기 양식에 속하며,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서 완비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
경주 신무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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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신무왕릉

신라 제45대 신무왕(재위 839)의 무덤이다. 본명은 김우징이고, 희강왕의 사촌동생이다. 흥덕왕 사후에 왕위 쟁탈전에서 아버지를 도왔으나 패하여 청해진으로 도망하였다가 장보고의 군사를 빌려 민애왕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형상 서북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왕경의 동남쪽인 동방동에 있는데, 능이 있는 구릉 동남쪽 산의 이름이 형제산이다. 높이 3.4m, 지름 15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주변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다.

경상북도 경주시 동방동
경주 헌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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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헌덕왕릉

경주 북천가에 있는 신라 제41대 헌덕왕(재위 809~826)의 무덤이다. 헌덕왕의 본명은 김언승이며,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재위기간 동안에 농사를 권장하고 당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김헌창의 난과 김범문의 난이 일어나는 등 국내정세가 혼란스러웠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26년에 왕이 죽자 천림사의 북쪽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천림사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왕릉의 남쪽에 절터가 있어 이곳을 천림사 터로 본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26m, 높이 6m이다. 봉분 밑의 둘레를 따라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둘레돌은 먼저 바닥에 기둥 역할을 하는 돌을 한단 깔고, 그 위에 넓적한 돌(면석)을 세웠다. 면석사이에는 기둥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다. 탱석에는 무덤을 수호하는 상징적 의미로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는데, 이 무덤에는 현재는 12지신상 중 돼지(해)·쥐(자)·소(축)·호랑이(인)·토끼(묘) 등 5개상만이 남아있다. 둘레돌 밖으로는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설치하고, 둘레돌과 난간 사이 바닥에는 돌을 깔았다. 지금의 모습은 1970년대에 정비된 것으로, 둘레돌의 일부와 돌난간석을 새로 만들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경주 법흥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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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법흥왕릉

신라 23대 왕인 법흥왕(재위 514∼540)의 무덤이다. 법흥왕은 신라를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체제로 완성시킨 왕이다. 왕권강화를 위해 상대등과 병부를 설치하였고, 520년 율령을 반포하였다. 532년 금관가야와 합병하여 낙동강유역에 처음 진출하였다. 신라 처음으로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중국 양[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527년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불교를 국가종교로 수용하고 고대국가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높이 2m, 지름 14m로 삼국시대 신라 왕의 무덤으로는 작은 편이다. 무덤 아래에는 둘레돌을 받쳤던 자연석이 있다. 법흥왕 이전의 왕 무덤은 평지인 경주 무덤들에 밀집되어 있어 소재파악이 어려우나, 그 이후의 왕 무덤은 구릉이나 교외에 2∼3기씩 따로 자리하고 있으며 소재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변화는 왕 무덤의 형태 변화와도 연관되는 듯한데 그 변화의 시작을 법흥왕릉에서 찾아볼 수 있어 중요한 곳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경주 서악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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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서악동 고분군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 바로 뒤편의 구릉에 분포하는 4개의 대형 무덤을 가리킨다. 고분의 모양은 모두 원형이며 주위에 별다른 구조물이 없다. 봉분 가장자리에 둘렀던 둘레돌이 일부 노출되어 있는데, 모두 깬돌을 사용했다. 대부분 냇돌을 쓴 대릉원 일원의 고분들과 차이를 보인다. 내부 구조는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들보다 작은 고분들이 주변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모두 굴식돌방무덤이다. 이들 무덤이 분포한 지형은 선도산에서 서남으로 뻗은 능선상에 있고, 뒷산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사상의 영향하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 첫 번째 무덤은 법흥왕릉, 두 번째 무덤은 진흥왕릉, 세 번째 무덤은 진지왕릉,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릉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경주 지마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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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지마왕릉

신라 제6대 지마왕(재위 112~134)의 무덤이다. 지마왕은 신라 5대 파사왕의 아들로 태어나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았다. 지마왕의 재위 기간에는 신라는 백제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가야와는 낙동강 하류를 둘러싸고 패권을 다투었다. 왜인들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으나 교섭하여 강화를 맺었고, 북쪽에서 말갈이 쳐들어오자 백제의 도움을 받아 물리쳤다. 무덤은 포석정에 남쪽으로 200m 떨어진 남산 서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왕릉 중에서는 작은 편에 속하며, 외형과 입지로 보아 내부 구조는 굴식돌방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건청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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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역사관광

건청궁

건청궁(乾淸宮)은 1873년(고종 10)에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지어진 궁 안의 궁이다. ‘건청’은 ‘하늘은 맑다’라는 뜻으로, 경복궁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민간 사대부 집의 형태를 따르면서 화려하고 섬세한 치장을 가미하여 지었다. 건청궁의 왕의 생활공간인 장안당(長安堂, 오랫동안 평안하게 지냄)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곤녕합(坤寧閤, 땅이 편안함)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장안당과 곤녕합은 복도로 이어져 있다. 이곳에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10년 정도 생활하였다. 그러나 1895년(고종 32) 곤녕합 옥호루(玉壺樓, 옥으로 만든 호리병)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고종은 이듬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후 1909년(융희 3)에 철거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미술관이 들어섰다가 철거된 후 2007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거창 요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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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역사관광

거창 요수정

요수정은 요수 신권 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1542년 구연재와 남쪽 척수대 사이에 처음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805년 후손들이 수승대 건너편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상량문에 1800년대 후반에 수리한 기록이 있다. 요수정은 수승대 건너편 솔숲에 부속건물 없이 홀로 세워진 중층의 정자이며,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면 어칸의 배면에 1칸의 방을 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로 구성하였다. 요수정은 자연 암반 위에 바로 세운 건물로 초석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특별히 기단을 조성하지는 않았고, 배면 쪽에 경계의 표시와 굴뚝을 겸하는 낮은 돌담을 쌓았다. 수승대의 경치를 감상하고, 시회와 교육 등을 위해 솔 숲에 만들어진 전형적인 전통정자 건물로 형태가 매우 아름답다. 산간지역의 기후를 고려하여 정자의 내부에 방을 들이고 있어 이 지역의 건축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은하리길 100
경상좌수영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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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역사관광

경상좌수영성지

경상좌수영성지는 경상도 옛 수군의 본영이었다. 좌수영은 조선시대에 동남해안을 관할했던 군영으로 예로부터 남쪽 지방이 지리적인 요인으로 잦은 왜구의 침략으로 피해를 받자,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부산에는 경상좌수영을, 통영에는 경상우수영을 세워 남쪽의 방위를 책임졌다. 원래 좌수영은 남구 감만동에 있었는데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이전했다가 임진왜란 직전에 현재의 수영동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좌수영성의 축조연대는 정확하지 않고 1692년에 개축한 것이라 한다. 좌수영의 동, 서, 남, 북에는 영일문, 호소문, 주작문, 공진문이라 불리는 4개의 문이 있었으며, 일정한 시각에 폐문루, 관해루에 달아둔 북을 울려 여닫았다. 그밖에 3개의 우물과 4개의 배수구, 옹성, 치성, 보루 등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파손되어 현재는 성벽임을 짐작하게 해주는 돌 터와 홍예문, 배수구, 그리고 성의 존재를 짐작하게 하는 남문만이 자리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성로 43
경주 망덕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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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망덕사지

경주 낭산[狼山]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사천왕사와 마주하고 있다. 처음 지어진 때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라 문무왕 또는 신문왕 때로 전한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목탑터와 그 북쪽으로 금당터와 강당터, 남쪽으로 중문터, 그리고 이를 둘러싼 회랑터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형의 쌍탑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중문터 남쪽에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당간지주(보물)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경주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으로 그 의미가 크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경주 탈해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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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탈해왕릉

경주 동천동에 있는 신라 제4대 탈해왕(재위 57~80)의 무덤으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무덤의 형식 자체는 일반적이나, 신라 초기의 왕릉이고 특히 최초의 석 씨 왕릉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무덤은 높이 4.5m, 지름 14.3m 크기로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봉토무덤이다. 주변에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으며, 겉으로 보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왕릉 초입에는 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전각 숭신전이 있다. 탈해왕은 신라 최초의 석 씨 왕으로 62세에 즉위하여, 24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왜국에서 동북쪽으로 1천 리 떨어져 있는 다 파나 국(또는 완하국, 용성국)의 왕비가 잉태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그 알을 궤에 넣어 바다에 버리니 동해 아진포에 닿았다. 그때 한 할머니가 이것을 열어 보고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다. 배에 까치들이 울며 따라왔으므로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 자를 떼서 석(昔)으로 성을 삼고, 아이가 궤를 풀고 나왔다 해서 이름을 탈해(脫解)라 지었다. 탈해왕은 석 씨의 시조로서 신라 최초 석 씨 왕이 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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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은 경주 손 씨 큰 종가로 이 마을에서 시조가 된 양민공 손소(1433∼1484)가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집이다. 양민공의 아들 손중돈 선생과 외손인 이언적(1491∼1553)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一자형 대문채 안에 ㅁ자형 안채가 있고 사랑채 뒤쪽 높은 곳에 신문(神門)과 사당이 있다. 안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고 사랑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사랑방과 침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ㄱ자형으로 놓여 있는 사랑채 뒤편 정원에는 수백 년 묵은 향나무가 있다. 대개 사랑방은 큰 사랑방 대청 건너편에 작은 사랑방을 두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집은 작은 사랑을 모서리 한쪽으로 두어 방과 방이 마주하지 않도록 한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일종의 마루통로 형식으로 꾸민 점 역시 특이하다. 종가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사랑채 뒤편 정원의 경치 역시 뛰어난데 건물을 지은 수법과 배치 방법들이 독특하여 조선 전기의 옛 살림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위 국가유산은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으므로 참고해야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75-6
거창 황산마을 옛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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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역사관광

거창 황산마을 옛 담장

거창 황산마을은 18세기 중엽에 황고 신수이가 입향하면서 번성한 거창신씨 씨족마을로 마을의 생성은 16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조선시대 영조 이후 인물이 연이어 배출되었다고 전해진다. 마을 어귀에는 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폭 5m 이상, 높이 15m 이상의 수령 600년에 달하는 고목이 자리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이 고목을 안정좌 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은 대체로 평탄하며 마을 동측에 흐르는 호음천을 중심으로 큰땀과 동촌으로 구분되어 있다. 마을 내 주택들은 대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한말과 일제강점기 지방 반가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며 규모와 형식면에서 월등함을 보여주는 시도민속자료 거창 황산마을 신씨고가 등의 지정문화유산은 전통마을로서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마을 전체는 약 50여호로 거의 안채와 사랑채를 갖추고 있으며 이렇게 한 마을 전체가 모두 기와집으로 무리지어 있는 것은 이른바 씨족부농촌으로 소작마을을 별도로 두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담장은 대개 토석담으로 담 하부 2~3척 정도는 방형에 가까운 제법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진흙을 사춤하지 않고 대부분 메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이는 도로보다 높은 대지 내 우수를 담 밖으로 자연스럽게 배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자연석으로 메쌓기 한 위에는 하부의 자연석보다 작은 20㎝ 내외의 돌을 담 안팎에 사용하여 진흙과 교대로 쌓아 올렸고 대부분 담장 상부에는 한식기와를 이었으며 또한 근년에 쌓은 담장은 기존 담장과 달리 엇쌓기를 하였다. 마을의 시한당 앞 연못은 일반적인 한국 전통의 연못양식인 방지원도형이 아닌 원지방도형으로 구성되어 있어 독특하다. 전반적으로 전통고가와 어우러진 활처럼 휘어진 전통 담장길은 매우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1길 109-5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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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경주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 이 석불들은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三尊佛]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본존불은 머리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표면이 매끄럽게 표현되었다. 어린아이 표정의 네모난 얼굴은 풍만하며,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을 통하여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佛性]을 표현하고 있다. 목이 표현되지 않은 원통형의 체구에 손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는데,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올리고 있다. 묵직해 보이는 옷은 불상을 전체적으로 강직해 보이게 하지만, 어린아이 같은 표정과 체구 등으로 오히려 따뜻한 생명을 실감 나게 표현하고 있다. 왼쪽의 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가는 허리를 뒤틀고 있어 입체감이 나타난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 보병[寶甁]을 잡고 있는데, 보관에 새겨진 작은 부처와 더불어 이 보살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오른쪽의 보살 역시 잔잔한 내면의 미소를 묘사하고 있는데, 무겁게 처리된 신체는 굵은 목걸이와 구슬장식으로 발목까지 치장하였다. 조각솜씨가 뛰어난 다정한 얼굴과 몸 등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가 풍기고 있는 작품으로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신문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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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신문왕릉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의 무덤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로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옛 백제와 고구려 백성을 융합하는데 힘썼다. 국립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고, 귀족들의 기반이 되면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였다. 지방을 통치하기 위해 전국을 아홉 개의 주로 나누고 중요한 거점 다섯 곳에 소경을 설치하였다. 신문왕이 죽은 후에는 낭산 동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낭산 남쪽 끝자락에 있다. 무덤은 높이 7.6m, 지름 29.3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가장자리의 둘레돌은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었다. 바깥쪽 사다리꼴 모양의 석재를 받쳐 놓았다. 정남쪽에 배치한 받침석의 윗부분에 ‘문(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이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널길 입구라는 것을 표시한 듯하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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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역사관광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

금귀봉의 동남쪽으로 뻗어있는 산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는 무덤으로 이 일대는 석장골 또는 재궁골이라 불리던 곳이다. 고분의 모양은 능선 상의 좁은 평지 위에 방형으로 지대석을 설치하고 그 위에 호석을 올려놓고 봉토를 쌓은 방형호석 형태이다. 석축의 동쪽, 서쪽에 2구의 석인이 있는데 동쪽 석인은 두관을 착용한 문인석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형상이다. 서쪽의 석인은 가슴 윗부분이 절단되고 하반신만 남아 있으나 동편과 비슷한 형태로 보인다. 근처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일반인들의 무덤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며, 둔마리고분은 발견 당시에는 파괴가 심하였으나 지금은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무덤 내부 구조는 상자형 쌍돌덧널로 먼저 땅을 판 후 판석으로 벽을 두르고 그 안에 덧널을 설치한 굴식돌방무덤으로 서쪽에 있던 덧널에는 나무로 만든 널이 1개가 들어 있었으며 동쪽 돌덧널은 비어 있었다고 한다. 양쪽 돌덧널 모두 벽면에 회칠을 하고 흑·녹·갈색으로 인물을 그린 벽화가 있고, 동쪽 돌덧널의 동쪽 벽에는 선녀 6명의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북쪽 벽에 글자가 희미하게 나타나 있다. 서쪽 돌덧널의 서쪽 벽에는 여자 두 명, 남자 한 명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벽화의 내용은 악기 연주 그림으로 붓의 움직임이 자유롭고 생기가 있으며, 불교의 사상이 중심이 되면서 도교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