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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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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교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1유형
경상남도 사천시역사관광

곤양향교

곤양향교의 창건연대는 명확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으나 곤양군이 세종 원년(1419)에 군으로 승격되었음을 상기할 때 향교도 세종시대에 창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중종(中宗) 25년(1530)에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곤양군조에 의하면 "관원은 군수·훈도 각 1인씩이다."라는 기록을 보아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득강이 곤양군수로 부임한 후 그의 많은 업적 가운데 특히 향학에 힘써 많은 유생)을 길러 내었다 한다. 그 후 명종 1년(1546)에 군수 노진이 부임해 와서 처음으로 정동)에 터를 잡아 문묘를 지었다 하였으므로 이 향교 역시 전학후묘형의 소설위 향교임을 알 수 있다. 현종 4년(1663)에는 군수 박영계가 범동으로 옮겼고, 순조 7년(1807)에는 군수 신오가 부임해 와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서 대성전, 대성문, 명륜당, 동재, 서재, 풍화루 등 9동의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대성전 좌우에 동·서 양무가 없고, 대성전의 위치 또한 명륜당 뒤의 오른쪽에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어 두 영역이 완전히 분리된 배치를 보이고 있다.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과 동·서재가 앞에 있고, 사당인 대성전과 사당 출입문인 내삼문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해 왔으며, 문묘의 위차위패를 모시는 순서)나 향사 등은 모두 사천향교와 같다.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면 향교길 43-31
계룡 사계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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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계룡시역사관광

계룡 사계고택

계룡 사계고택은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예학자였던 사계 김장생 선생이 말년에 살았던 집으로 후학 양성과 학문에 전념하던 곳이다. 현재 충청남도 기념물 제1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 2800여 평의 넓은 대지에 남쪽으로부터 대문채·은농재·행랑채·안채, 그리고 그 뒤에 가묘가 일곽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또 안채의 왼쪽 편에 나 있는 협문을 지나면 다시 안별당 건물이 있고 그 앞쪽으로 큰 연못이 있는데 이 주변에는 많은 괴목들이 우거져 풍취를 더 하여 주고 있다. 뒤쪽으로는 왕대산까지 이어지는 사계 솔바람길이 있어 선생의 발자취도 느껴보고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체험을 진행하며 일정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 사계로 122-4
고산사 석조나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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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역사관광

고산사 석조나한상

제천 와룡산의 고산사 응진전에 봉안된 나한상이다. 나한이란 아라한의 준말로, 소승불교의 수행자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성자를 말한다. 사찰의 기록에 의하면 고산사는 신라 말 고려 초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절에서 수습되는 기왓조각, 청자 조각 등은 고려와 조선 때의 유물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관음보살을 중심으로, 좌우로 배치된 고산사 나한상은 조선 중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나한상은 주로 석고로 만들거나 흙으로 만들었는데, 이 나한상은 돌로 만들어 그 예가 극히 드물다. 제천 고산사 석조나한상군은 충주 신흥사 석조나한상과 더불어 충청북도 북부 지역에 보존되고 있는 자료로서, 충청북도 지역에서 조선시대 나한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월악로9길 113
고산사 석조관음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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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역사관광

고산사 석조관음보살좌상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와룡산의 고산사 응진전에 모셔진 관음보살상이다. 응진전에 모셔진 관음보살상은 조선 중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에 매우 정제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과 몸체의 각 부분도 균형미가 보인다. 다만 양 어깨가 위축되고 턱이 크게 숙여지는 등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불상 양식을 지닌 탓이다. 사찰에 1920년대에 제작한 중수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신라말 고려초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로 나타난다. 그러나 절에서 발견되는 기와조각, 청자조각 등은 고려와 조선의 유물들이어서 확실하지 않다.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월악로9길 113
고부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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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역사관광

고부향교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부향교는 처음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0년(1597)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라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서무, 직사, 내삼문, 외삼문, 홍살문 등이며, 전해오는 유물로는 제기, 제복, 서적들이 있다. 대성전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보다 위쪽에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교동4길 18
고흥 무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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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 고흥군역사관광

고흥 무열사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에 전공을 세운 진무성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호남 유림의 발의와 영남 유림의 협찬으로 고종 19년(1882) 이전에 있던 용강사를 계승하여 건립한 것이다. 진무성은 이순신이 지휘했던 당포해전, 옥포해전 등의 여러 전투와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으며, 난이 끝난 후 선조 32년(1599)에 무과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용강사는 순조 26년(1826)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에 건립되어 진무성 장군 외 3인이 제향 되었으나, 고종 5년(1868) 사원 철폐령에 의해 철폐당한 후 복원하여 무열사라 하였다. 4.5㎞ 거리에 운암산이 있으며, 운암산 중턱의 수도암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고흥군 두원면 동신안길 21-6
경주 효소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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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효소왕릉

이 능은 신라 제32대 효소왕(재위 692~702) 무덤이다. 신문왕(재위 681~692)의 맏아들로서 6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며, 어머니인 신목태후가 8년간 섭정하였다. 효소왕의 재위 기간에 관제를 정비하고 의료 교육기관인 의학을 설립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성을 많이 쌓았고, 왕도에 물품의 유통을 쉽게 하기 위해 시장을 열었다. 효소왕이 죽은 후 망덕사 동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시가지 동남쪽 형제봉의 남서쪽 산자락에 있다. 동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 동생인 성덕왕의 능이 있다. 능의 높이는 4.3m, 지름은 10.3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석을 돌렸으나 현재 몇 개만이 남아있다. 무덤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혼령이 머무는 자리라는 혼유석만이 있다. 내부 구조가 돌방무덤인 것을 확인하였다.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
계룡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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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군역사관광

계룡돈대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 내 접경지역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한 초소로,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망월평야 남서방향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이 돈대는 바깥벽 측면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망월돈대와 함께 관아에서 관리하던 돈대이다.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해 조선 숙종 5년(1679)에 설치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처럼 돈대의 재작년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보기 드문 예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경희궁 흥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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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역사관광

경희궁 흥화문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이다. 원래 경희궁으로 들어가는 문읜 5개로, 정문인 흥화문 외에도 동쪽에 흥원문, 서쪽에 숭의문, 남쪽에 개양문, 북쪽에 무덕문이 있었다. 창건 당시 경희궁은 창경궁 제도를 따라서 규모를 작게 하여 정문도 단층으로 세웠다. 경희궁 근처 얕은 고개를 ‘야주개’라 하였는데, 이는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라 밤에도 빛이나 그 광채가 고개까지 훤하게 비추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흥화문은 원래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서 동쪽인 종로를 향하게 지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들어 1915년에 도로가 확장됨에 따라 흥화문은 원래 위치에서 약간 뒤로 옮겨지면서 문의 방향도 도로와 나란하게 남향으로 바뀌었다.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찰인 박문사를 건립할 때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흥화문을 떼어갔다. 광복 이후 박문사가 폐지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과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그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8년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옛 개양문이 있던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면서 궁궐 정문으로서의 역사성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신문로2가)
고창 분청사기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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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역사관광

고창 분청사기요지

전북 고창군 수동리에 있는 분청사기 가마터로, 구릉 위 작은 저수지의 경사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으며, 가마벽 부분·도자기 만들던 도구·분청사기 조각들이 널려있다. 그릇은 대접·접시·잔·항아리·큰 사발 조각이 주류를 이루며, 유약의 색은 회청색을 띠고 그릇을 빚던 흙에는 이물질이 많이 섞여 있다. 문양은 연꽃무늬, 물고기 무늬, 모란무늬들이 대범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일부 그릇에 ‘내섬(內贍)’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전라도지방의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널리 발견되는 것으로 관청용 분청사기도 제작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부안면 수동리
고창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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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역사관광

고창향교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창향교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월곡리에 있던 학당사을 옮겨온 것으로, 조선 중종 7년(1512)에 다시 지었다. 대성전은 선조 38년(1605)에 수리하였고, 1974년에 기와를 보수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고창향교는 이 지방의 향토사 연구에 필요한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 향교길 27-3
고성장산리허씨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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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고성군역사관광

고성장산리허씨고가

경남 고성 장산리 허씨고가는 조선 고종 2년(1865)에 건축되어 허씨 4대 선조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사당과 안사당, 가옥 한 채와 2층 건물로 이루어진 구조로, 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에 걸쳐 건축된 한식 전통가옥과 화식주택이 혼합된 대표적인 가옥으로써, 건축구조형식과 건축재료 및 평면 구성이 복합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건물 배치는 안채, 안사랑채, 바깥사랑채, 솟을대문, 가묘, 광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정면 4칸 초가집의 안채는 퇴락하여 헐리고 초석과 기단만 남아 있다. 안사랑채는 앞면 5칸, 옆면 2칸, 한식토기와의 우진각지붕으로 안채 전면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안사랑채 뒷면의 안마당은 앞면과 사랑 마당으로 구분되어 독립된 대청 공간을 배치한 평면구성을 이루고 있다. 가옥은 1912년에 지은 집이고, 손님 접대나 서재로 사용하고 있다. 2층 건물은 현재 집무실로 사용 중인데, 가옥과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경상남도 고성군 마암면 장산길 21
공주 갑사 철당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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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역사관광

공주 갑사 철당간

보물인 갑사 철당간·지주는 당을 다는 철깃대와 기둥이다. 당간은 절 앞에 세우는 깃대인데 부처나 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표시하고 사악한 것을 내쫓는 기능을 가진 당이라는 깃발을 달기 위한 깃대이며, 당간지주는 당간을 좌우에서 지탱하기 위한 버팀 기둥을 말한다. 갑사 철당간은 지름 50센티미터의 철통 24개를 이어 놓은 것으로 당간의 높이는 약 15미터이다. 그러나 1893년에 4개의 철통이 부러져 처음보다 낮아졌다. 이 철당간·지주가 만들어진 시기는 갑사가 신라 의상대사가 일으킨 화엄종 10대 사찰 중 하나였다는 점과 받침돌 측면에 새겨진 안상조각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된다. 갑사의 철당간 지주는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당간 형태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노송과 느티나무숲이 우거진 계룡산의 서북쪽 기슭에 위치한 절이다. 공주에서 19㎞ 떨어져 있고, 동학사에서 도보로 3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춘마곡, 추갑사라는 말이 암시해 주듯이 갑사의 가을 단풍은 더없이 아름답다. 삼국시대 초기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에 고구려에서 온 아도 화상이 창건하였다. 갑사는 계룡 갑사, 갑사, 갑사사, 계룡사 등으로 불려 왔으며, 통일신라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였던 명찰이다.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고창 무장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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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역사관광

고창 무장객사

고창군 무장면에 있는 무장객사는 조선시대 무장현에 내려온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조선 선조 14년(1581)에 건립되었다. 본관에 걸린 궐자를 새긴 나무 패는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과 지방관리들은 여기에 경의를 표했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면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축하의식을 행하였다. 본관은 돌을 쌓고 그 위에 세운 것으로 계단에 새긴 호랑이, 구름 등의 조각이 운치가 있다. 좌우 건물의 지붕이 본관보다 낮은 점은 격을 낮추기 위해서이다. 이 객사의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초석 석재 하부는 네모지게 상부는 반구형으로 다듬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것 외에 별다른 특징은 없다. 건물 정면의 정원이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객사 건물은 면사무소로 사용하면서 일부 형질을 변경했던 것을 1990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무장객사 뒤편에는 무장수령이 관아를 통치하던 관청의 건물인 동헌이 위치해 있어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무장면 무장읍성길 45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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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역사관광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무장읍성은 1417년 무장진의 병마사에 마을을 다스리는 기능을 주어 무장진 병마사 김노가 쌓은 길이 약 1.2㎞의 평지성이다. 읍성의 남문인 진무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동문터도 잘 남아 있다. 성 주위를 둘러싼 물길인 해자는 폭 4m, 길이 574m 정도로 그 흔적만 남아있다. 성 안의 건물로는 객사, 동헌이 있다. 에 의하면 읍성의 둘레는 1,470척(약441m), 높이 7척(약 2m)이며 해자의 둘레는 2,127척(약 638m)이고 문은 2개가 있으며 성의 규모를 넓혀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흙으로만 축조된 토성으로 알려져 왔던 이 성이 공사 때 성벽 동쪽 끝부분의 단면이 드러났었는데 성곽일부가 흙과 돌을 섞어서 축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1915년에 발견된 에 의하면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0,000여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 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 전한다. 한편 1894년 일어났던 동학 농민혁명은 이곳 무장읍성에서 맨 처음 봉기하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무장읍성은 조선시대 옛 읍성의 모습을 연구하고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무장면 무장읍성길 45
공주 우금치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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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역사관광

공주 우금치 전적

공주 우금치 전적은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격전을 벌인 장소이다.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기슭의 고개로 우금 고개, 우금재 또는 비우금 고개라고도 부른다. 우금치 고개는 호서지방의 요충지이며 중부지역의 거점으로, 충청도 감영소재지가 있는 공주 남쪽의 중요한 관문이었다.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반봉건과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죽창으로 대항한 곳으로 한국 근대사에서 매우 뜻깊은 장소이다. 우금치 전적은 역사의 현장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으며, 동학군의 넋을 위로하기 1973년 동학혁명군위령탑을 세웠다.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
경주 황룡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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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황룡사지

황룡사는 6세기 신라시대 때 만들어져 고려 13세기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진 사찰로 지금은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터만 남아있다. 면적 8,800평 규모에 불국사의 8배나 되는 대형 사찰로 추정된다. 왕명으로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하기 시작하여 566년에 주요 전당들이 완성되었고, 금당은 584년(진평왕 6)에 완성되었다. 선덕여왕 14년(645년) 탑의 건조까지 모두 완성된 황룡사는 신라의 호국 신앙의 중심지였다. 황룡사 경내에는 신라 보물 중 하나인 황룡사 구층 목탑이 있었으며 이는 당나라 유학 후 돌아온 승려 자장대사의 건의로 백제의 아비지에 의해 3년 만에 완성된 신라의 상징물이었다. 현재 구층 목탑이 서 있던 자리에는 탑을 지탱해 주었던 중앙 기둥 주춧돌인 심초석이 남아 있다. 이 절은 신라 왕궁 월성의 동쪽에 있었는데, 그 창건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이 새로운 궁을 월성 동쪽 낮은 지대에 건립하려 했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왕이 새로운 궁 건립을 중지하고 절로 만들게 하여 황룡사라는 사명을 내렸다고 한다. 국가적인 사찰이었기 때문에 역대 국왕의 거동도 잦았고 신라 국찰 중 제일의 자리를 지켰다. 신라 멸망 후에도 고려 왕조에 이어져 깊은 숭상과 보호를 받았으며 탑의 보수를 위해 목재까지 제공받았다. 그러나 1238년(고종 25) 몽골군의 침입으로 탑은 물론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졌다. 1969년 강당지를 발굴조사하여 금당, 강당, 탑지의 초석을 발굴했고, 1976년 3월부터 8년간의 발굴 작업에서 독특한 가람배치인 일탑 삼금당식으로 밝혀졌으며,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단을 비롯한 건물 하부구조는 확인되었으나, 상부가 정확히 고증되지 않아 전체적인 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64개 주춧돌로 된 기단부만 복원하였다. 황룡사지 터 옆에는 황룡사 건립부터 소실까지의 과정을 담은 3D 영상 시청각실,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신라 역사전시실 등으로 구성된 황룡사지 황룡사 역사문화관이 있으며 1층에는 황룡사 구층 목탑을 10분의 1 크기로 재현한 모형탑이 전시되어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고산사(장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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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 장흥군역사관광

고산사(장흥)

고산사는 장평면에서 남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용두산 협곡에 위치한 자그마한 사찰로 인근에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은 없다. 고산사에는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유형문화재인 고산사 석조여래입상이 볼만하다. 경내에는 약사보전과 요사채가 있고 약사보전 안에는 고려초기 석불인 약사여래 석불이 있다. 원래는 절터만 남아 있고 석불입상은 파손된 채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1966년 새로 지은 법당 안에 모셔놓았다. 이 석불은 외모상으로는 둥근 모양의 광배를 갖추고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 묶음이 높게 솟아 있고 계란형의 얼굴은 풍만하다. 가늘게 뜬 실눈, 부은 듯이 도드라지게 표현된 눈두덩, 두툼한 입술은 꼭 다물고 있다. 좁은 어깨를 감싼 옷은 수직선을 그리며 아랫부분으로 내려오고 있다. 손 모양은 양팔을 구부려 앞가슴에 대고 있으나 옷 주름에 가려 그 모습을 알 수 없다. 이 석불은 아랫부분은 확인이 어려우나 광배와 얼굴에서 중국 당나라 불상과 비슷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장흥군 장평면 하탑동길 120
고령 지산리 당간지주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1유형
경상북도 고령군역사관광

고령 지산리 당간지주

지산리 당간지주는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지산동 민가 안에 있는데, 그 일대가 부락으로 변하여 옛 절터를 찾아볼 수 없으나, 원위치에 원상태로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을 미루어 당시 이 일대가 대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외면의 모서리를 죽이고 종문를 조각하여 매우 장식적이고 화려한 의장 수법을 보이고 있다. 지주의 정상부는 뾰족하고 바깥으로 내려오면서 3단의 굴곡을 활 모양의 선으로 처리하였으며, 지주의 안쪽에는 간공 두 개가 있는데 이들은 장방형의 형태로 구멍을 뚫어 간을 끼우도록 하였다. 지산동 당간지주는 상·하부의 크기가 거의 같아서 약간 둔중한 인상을 주지만 지주의 바깥둘레 각 면의 조각장식 수법으로 보아 가작(佳作)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단아한 조각이나 솜씨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조각기법과 다듬은 돌 등을 보아 통일신라시대 중기에 건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고현성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1유형
경상남도 거제시역사관광

고현성

거제 고현성은 축조당시 사등성의 인구가 늘어나자 문종 1년(1451)부터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단종 1년(1453) 완공한 읍성이며, 성의 둘레는 921m, 높이 4m이며, 동·서·남쪽 세 방향에 성문을 설치하였다. 성문 앞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만들어 적으로부터 성문을 완전히 보호하였으며,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를 설치하여 방어를 강화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읍성의 형태이다. 고현성은 임진왜란으로 함락되어 현종 4년(1663) 거제면으로 읍치를 옮길 때까지 210년간 읍성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성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고현지역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면서 성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지금은 600m 정도의 성벽만 남아있다.

경상남도 거제시 고현동
공주 황새바위 순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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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역사관광

공주 황새바위 순교성지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참수 처형으로 대표되는 순교성지이자 순교자의 처절하고 용기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모범을 통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지,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자리를 돌아보고 새로 나는 장소, 은총의 배움터이다. 박해시대 초기에는 사형 판결을 받은 사학죄인들에게 해읍정법이 적용되었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고자 사학죄인들을 출신 고향에서 공개 처형한다는 의미이다. 사학죄인으로 잡혀온 천주교 신자들이 배교를 거부할 경우 사형 판결 권한을 위임받은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제민천변 황새바위에서 참수 처형 되었다. 황새바위 순교성지의 위치는 지리학적으로 금강의 본류와 제민천의 지류가 만나는 모래사장으로 공개처형지로서의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1784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 세례를 받고 고향 내포에 내려와 신앙을 전하면서부터 시작된 내포교회는 곧 박해에 부닥치게 되었고, 기록상 마지막 순교자를 낸 1889년까지 100여 년 간 공주는 박해의 땅이었다. 신유박해(1801년)부터 시작하여 이존창 루도비코 및 이국승 바오로 등 16명이 이 시기에 참수처형 되었고, 병인박해(1866년) 시기에는 약 1,000여 명의 순교자가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공주는 천주교 4대 박해와 함께 100여 년 순교 역사의 현장이다. 공주는 내포와 더불어 천주교 전파가 가장 활발했던 곳이며, 조선시대에 충청감영이 있었기에 천주교인들이 가장 많이 처형된 곳이다.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잡혀온 천주교 신자들은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배교하기를 거부할 경우 사형판결 권한을 위임받은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처형을 당하였다. 지금까지 자료조사를 통하여 발굴된 순교자는 총 337명으로 이는 한국 최대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충청남도 공주시 왕릉로 118 (금성동)
고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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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역사관광

고산정

안동 고산정 일원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고산[孤山]의 빼어난 경관이 기록되어 있으며, 고산의 북쪽에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1564년(명종 19년)에 세운 고산정[孤山亭]이 들어서 있다. 고산정은 퇴계 이황과 금난수 등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교류하며 풍류와 학문을 나눈 장소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공간이며 퇴계가 유람했던 예던길과 농암종택이 인접한 가송협의 하천변 단애 아래에 위치해 있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물길과 바위, 숲과 고산정이 어우러진 조망구조를 잘 보여주며, 사계절 변화에 따라 다양한 풍광을 감상할 수 있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룬 경관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 드라마 고애신과 유진초이의 러브는 달콤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쉽지 않았다. 우연한 만남에서부터 노를 저어 나아가고, 함께 낚시하며 손을 잡다가, 얼음 위에서 서로의 신분 차이를 깨닫고 좌절할 때까지 그들 곁에는 낙동강과 고산정이 있었다. 청량산의 기암절벽과 그 옆 아담한 정자는 복잡한 현실을 잊게 해주고 강가에 서면 드라마 속 주막과 나루터는 없어도 애신과 유진의 대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고산정으로 들어가려면 나룻배를 타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 177-42
공주상신리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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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역사관광

공주상신리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당을 꽂아두는 기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의 양쪽에 서서 이를 지탱시켜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있으나 대부분 두 기둥만 남아있다. 이 당간지주는 마을 입구의 민가 뒷돌담에 서 있다. 남아있는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서 한쪽 기둥은 잘린 채 떨어져 있고, 다른 한쪽도 파손이 심하다. 기둥의 받침대는 여러 개의 돌로 조립되어 있으며, 옆면에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마주 보는 면에는 아래위 두 곳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홈을 파놓았다. 바깥면의 가운데에는 넓은 띠를 도드라지게 새겨놓았고, 앞뒷면은 가장자리에 테두리선을 넓게 둘러놓았다. 기둥사이에는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이 놓여 있는데, 그 윗면에 동그란 홈을 두어 당간을 꽂아두도록 하였다. 돌을 다듬은 솜씨나 각 부분의 꾸밈새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고산서원(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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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 장성군역사관광

고산서원(장성)

고산서원은 퇴계와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6대가 중 1인으로 추앙받는 노사 기정진이 고종 15년(1878)에 정사를 지어 담대헌이라 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후손들이 1924년 중건하였으며, 1927년에 고산서원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노사 기정진은 19세기 전라도 지역뿐만 아니라 멀리 제주까지 전국적인 후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노사선생연원록]이라는 제자록에 의하면 글을 배운 제자가 600여 명에 이르고, 그들의 제자들까지 합쳐 6,000여 명에 이르는 조선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대한단이 형성되었다. 또한, 노사의 제자들은 구한말 의병의 본류가 되기도 하였다. 고산서원은 문화유적 보호차원에서 완전히 개방하지 않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장성군 진원면 고산로 68
경충사(정기룡장군유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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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역사관광

경충사(정기룡장군유허지)

진양정공 보국숭록대부 충의공 정기룡 장군의 사당이다. 정기룡의 호는 매헌이고 조선시대인 1562년(명종 17)에 출생하였으며 1622년(광해군 14) 2월 한산도 통제영에서 삼군 통제사 재임 중 세상을 떠났다. 정기룡은 무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 당시 경상 우도방어사 조경 장군이 적에게 포로가 되자 구출에 성공하여 장군의 명칭을 얻었다. 그 뒤에도 크고 작은 싸움터에서 80여 회의 승전을 거듭하였다. 광해군 때 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총관, 도총관, 삼도 수군통제사를 거쳐 보국숭록대부에 이르렀다. 사당은 장군의 충의를 이어가고자 지방 선비와 후손들이 1932년에 건립하였으며, 장군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1989년 이후 경충사 성역화 사업이 본격화하면서 하동군 청소년 수련마을이 마련되어 있다.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경충로 503-14
공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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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괴산군역사관광

공림사

공림사는 낙영산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사찰로 신라 경문왕때에 자정선사가 창건한 고찰로 알려져 있다. 자정선사가 암자를 짓고 수도하던 중 그 법력과 덕화가 세간에 두루 알려지자 왕이 선사를 국사에 봉하고 입궐을 청하였으나, 세상을 떠나온 사람이 다시 세간으로 나갈 수 없다고 사양했다고 한다. 왕이 선사의 덕화에 감동받아 왕명으로 사원을 창건하고 공림사의 사명을 지어 액자를 하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 중기에는 법주사보다 더 흥하였지만, 이후 임진왜란으로 대웅전만 남고 소실되었던 것을 인조 때 중창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공비들이 절에 출몰한다는 이유로 토벌군에 의해 전소되어 폐사되었다. 공림사에는 부도, 사적비, 석조, 일주문 등의 유물이 있으며, 중건 시 세운 대웅전, 관음전, 삼성각, 감인선원 등 건물이 있다. 공림사 사적비는 1688년에 세운 것으로, 경내의 요사채 동쪽 언덕 아래에 있다. 앞면에는 공림사의 유래와 연력을 비롯해서 비의 건립 경위 등을 적었는데, 시주자, 승려, 주지, 각수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적비는 비문이 완전하여 조선 중기의 사회상과 지역의 동태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절 앞에 조성된 느티나무 숲과 절을 품고 있는 웅장하고 흰 바위산인 낙영산은 천년고찰 공림사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괴산로공림길 104
고란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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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부여군역사관광

고란약수

고란약수는 충남 부여군 부소산 북쪽 기슭 백마강(금강)변에 위치한 사찰 고란사의 약수이다. 이 사찰은 고란초에 의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법당 뒤편에서 나오는 약수와 함께 이 사찰의 명물을 이루고 있다. 고란사는 백제 멸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전설이 저하나 정확한 유적이나 유물은 없고, 현재의 고란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는데 현 사찰 건물은 은산 승각사를 이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인근 낙화암, 백마강 유람선과 함께 둘러보기 좋다. 고란약수는 성왕로, 석탑로 등을 통해 부소산성에 진입하여 접근하거나 나루터로를 통해 구드래나루터에서 백마강 유람선을 타고 접근할 수 있다. 인근 관광지로는 부소산성, 낙화암, 백마강 외에 정림사지5층석탑, 부여 구아리유적, 부여 쌍북리 요지, 부여향교, 궁남지, 국립부여박물관, 수북정 등이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5
계룡산신도내주초석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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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계룡시역사관광

계룡산신도내주초석석재

계룡산신도내주초석석재는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이다. 신도안면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후, 천도 후보지로 정했던 지역이다. 궁궐을 짓기 위해 1년여간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목재와 석재 등을 운반하다가, 신도안이 국토 남쪽에 치우치고 교통과 물 공급이 불편하며 풍수상 고려 개경과 유사하여 신 왕조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중단되었다. 이때 대궐터에 주춧돌로 쓰려고 가져다 놓은 주초석 약 115개가 남아 전해지고 있다. 1976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으며 현재 일부가 군사시설보호구역 안에 들어가 있어 전체를 관람하기는 어렵다.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경남 하동 악양면 [슬로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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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역사관광

경남 하동 악양면 [슬로시티]

슬로시티는 느리게 살기 미학을 추구하는 도시를 가리키는데 2009년 2월 6일 슬로시티 국제조정이사회에서 하동군 악양면이 상정되어 우리나라 다섯 번째의 슬로시티로 인증받았다. 하동 악양은 세가지의 향기가 있다. 평사리 최참판댁의 서희가 악양의 넓은 논두렁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소설 속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동은 섬진강과 함께 여러 지류가 있어 안개가 많고, 다습할 뿐 아니라 일교차가 커서 차나무를 재배하기 쉽고 차나무가 자라기 좋은 토질을 가지고 있다.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악양서로 357
경주 헌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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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헌강왕릉

이 능은 신라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의 무덤이다. 경문왕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이었다. 헌강왕은 왕은 불교와 국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문치를 지향하였다. 재위 기간에 해마다 풍년이 들어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헌강왕이 죽은 후에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이 있는 곳은 경주 남산 북동쪽의 자락이다. 무덤은 높이 4.2m, 지름 15.3m의 둥근형태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무덤 밑둘레에 돌을 4단으로 쌓았다. 1993년에 발굴조사로 석실 내부 구조를 확인했다. 동남쪽으로 널길이 있고, 서쪽으로 석실을 배치하였다. 석실 입구에 돌문, 문지방, 폐쇄석 등이 있으며, 서쪽 벽 접하여 시신을 안치한 시상이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경주 정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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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정강왕릉

이 능은 신라 제50대 정강왕(재위 886~887)의 무덤이다. 정강왕은 경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헌강왕의 동생이다. 황룡사에 백고좌를 설치하여 왕이 친히 강연을 들었다. 정강왕은 병이 깊어지자 누이동생인 만(진성여왕)이 왕위를 잇게 하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재위 기간은 만 1년에 불과하다. 헌강왕과 마찬가지로 보리사 동남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정강왕릉은 경주 남산의 북동쪽 능선 끝자락에 있는데, 북쪽에는 헌강왕릉이 있다. 무덤의 외형은 흙으로 덮은 둥근 형태로,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밑둘레에 3단으로 돌을 쌓았다. 그중 제일 밑단만이 밖으로 약간 나왔으며, 무덤 앞에는 돌단이 있는데, 그 위에 돌로 만든 작은 제사상이 있다. 무덤의 구조는 헌강왕릉과 같다. 그러나 1993년 헌강왕릉의 내부조사 결과, 그 구조와 나온 유물들이 8세기 이전의 형식이어서 이 왕들이 왕위에 있던 9세기와는 큰 차이가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경주 경애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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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경애왕릉

신라 55대 왕인 경애왕(재위 924~927)의 무덤이다. 경애왕은 신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경명왕의 동생으로, 경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군사를 보내어 고려를 도왔다. 927년에 포석정에서 제사를 지낸 후 연회를 베풀던 중 그곳을 기습한 후백제의 견훤에게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덤은 삼릉계곡 입구의 소나무 숲 안에 있다. 무덤의 가장자리를 따가라며 둘레돌로 보이는 석재가 일부 드러나 있다.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내부 구조는 굴식돌방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국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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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성북구역사관광

경국사(서울)

경국사는 1325년에 자정율사가 창건하였는데, 삼각산의 청봉 아래 있다고 하여 ‘청암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창건주인 자정율사는 계율에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법화(法華), 유식(唯識) 등에서도 조예가 깊었으며, 계율과 법화경(法華經) 관음신앙을 승상 하던 사찰이었다. 그리고 1349년 태고보우(太古普愚) 국사가 중국에 가서 석옥청공(石屋淸珙) 스님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고 귀국하여 경국사에 공민왕의 청을 받아 금란가사와 주장자(拄杖子)를 하사 받고 국사가 되었다. 1545년, 명종조(明宗朝) 때 왕모(王母)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사를 하면서 국가의 경사스러움을 끊어지지 않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경국사’로 개칭하였다. 그 후 1698년에는 연화승성 스님이 절을 중수하고 천태성전을 세웠다. 천태성전은 독성을 모신 전각으로 이때 기록한 『천태성전상량문』이 지금도 전한다. 전 대통령 이승만도 경국사에 주석하던 보경스님이 인품에 감화되어 전 닉슨 부통령과 함께 참배한 일화도 전한다. 1977년부터 1985년까지 보경 금어 큰스님이 뒤를 이어 주지 소임을 맡은 지관 대종사(전 조계종 총무원장)가 경국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시켰으며, 2005년에 한국불교의 율풍 진작에 헌신했던 자운대율사의 계주원명사리탑(戒珠圓明舍利塔)도 이곳에 세워졌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국문로 113-10 (정릉동)
경주 진평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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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진평왕릉

경주 진평왕릉은 신라 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의 무덤이다. 진평왕은 독자적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중앙 행정부서를 설치하였다. 또한 중국의 수·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을 효율적으로 막았고, 경주 명활성을 보수하여 수도 방위에 힘썼다. 높이 7.9m, 지름 36.4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 몇 개만 남아있다. 규모로 보아 왕릉급 무덤임이 분명하며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608
경기광주 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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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역사관광

경기광주 한옥마을

400년이 넘은 충남 광천의 사대부 한옥을 그대로 옮겨 복원시켰다. 1,000년 수령의 느티나무와 소나무들이 한옥과 어우러져 계절마다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다. 수려한 자연 속에서 한옥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끼며 삶의 여유를 느껴볼 수 있다. 남한산성의 산기슭 아래 한옥스테이와 카페가 위치하고 있어 다채로운 체험을 할 수 있다.

경기도 광주시 새오개길 39 (목현동)
경극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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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역사관광

경극고택

경주 최 씨 집성촌인 대구광역시 옻골마을은 본래 종가, 장자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둘째 아들을 자리 잡게 하여 어느덧 200년이나 된 고택이 바로 경극고택이다. 대구 관광두레 주민사업체인 옻골마을에서는 잘 보존된 고택들과 적절하게 정비된 현대시설로 남녀노소 누구나 조선시대의 문화체험이 가능하다. 과거 조선 시대로 돌아간 듯한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한옥 스테이부터 다양한 전통 체험까지 즐길 수 있다.

대구광역시 동구 옻골로 1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