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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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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초기화
검암서원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역사관광

검암서원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에 있는 조선 후기 조헌을 비롯한 9인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조헌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이며 의병장이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여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많은 관직을 거쳤으나 직언을 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과 함께 나라를 위해 싸우기도 하였으며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인물이다. 조선 현종 2년(1661) 지방 유림의 공의로 조헌을 주향하고 별좌 한일휴, 참봉 신지익, 찰방 송국헌, 의민공 연최적, 부사 지여해, 사우당 이동형, 도사 변상회, 병암 신영식, 범촌 박문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폐되었다가 광복 뒤 지방 유림이 관계 기관의 도움을 받아 1958년에 복원하였으며, 1960년에 중수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 중앙의 신문과 양옆의 협문 등이 있다. 사우에는 조헌을 주벽으로 10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병암리 215-2
거창향교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경상남도 거창군역사관광

거창향교

1415년에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이후 대성전을 설립하고 1572년에 현감 서의가 중건하였으며, 1574년에는 현감 장문한이 명륜당을 건립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23년에 대성전을 중건하고 1714년에는 현감 김시빈이 대성전 앞에 춘풍루를 건립하였다. 1748년에 도유사 김천분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809년에 도유사 이상조가 중건하였다. 1840년에 도유사 이준옥과 재임 변윤석, 어재의 등이 협의하여 동재와 서재를 중수하였으며, 1799년에는 부사 이성이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중수하였다. 그 뒤 1948년 군정법령에 의해 향교의 재산이 향교재단으로 귀속되고 1950년의 농지개혁법으로 전답이 분배되어 계속 황폐해지다가 1974년 향교직제에 따라 중건 및 보수가 시작되어 1976년 전면 복원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전답과 노비, 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초하루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성산길 34
경산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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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산시역사관광

경산향교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경산향교는 고려 공민왕 2년(1390) 옥곡동에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여러 차례 다시 세웠는데 조선 숙종 7년(1681) 신교동을 거쳐, 현재의 위치로 이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향교에 모시던 위패가 위험해지자 향교의 종이었던 강개명이 성암산 동굴로 옮겨 놓아 무사했다고 한다.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앞에 두고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뒤쪽에 둔 전묘후학의 배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경상북도 경산시 향교길 14-19 (중방동)
경북 청송 주왕산면·파천면 [슬로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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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청송군역사관광

경북 청송 주왕산면·파천면 [슬로시티]

백두대간 오지 중의 오지 경북 청송이 2011년 6월 25일 슬로시티로 선정되었다. 슬로시티(Slow City)는 느리게 살기 미학을 추구하는 도시를 가리키며 빠른 속도와 생산성만을 강요하는 빠른 사회(Fast City)에서 벗어나 자연·환경·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여유 있고 즐겁게 살자는 취지로 시작되었으며 전통 보존, 지역민 중심, 생태주의 등 이른바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마을을 의미한다. 청송 파천면에는 대표적인 두 개의 마을이 있다. 하나는 청도 덕천마을로 청송 심씨의 집성촌이며 총 7채의 고택이 있고, 다른 한 곳은 한옥의 정취와 옛 선비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중평 선비마을이다. 두 마을 모두 수려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조선시대 가옥이 남아 있는 고즈넉한 마을이다.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한 문화 체험과 한옥스테이를 진행하고 있고, 비용은 별도 문의해야 한다.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이전앞길 1
결성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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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홍성군역사관광

결성동헌

조선시대 홍성지방 관리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행정업무를 처리하던 동헌과 치안업무를 처리하던 형방청, 책과 문서를 보관하면서 관리의 자제가 지내던 책실로 구성되어 있다. 동헌은 고려말에 결성면 금곡리 분우터에 있다가 정종 2년(1400)에 결성읍 산성 정상으로 옮겼다. 현종 6년(1665) 현재의 위치인 읍내리에 다시 지었고,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동헌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형방청은 ‘ㄱ’ 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책실은 앞면 2칸·옆면 1칸 반 크기로,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인 우진각지붕이다.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홍남서로738번길 23
경주 성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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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성덕왕릉

경주에서 불국사 방향으로 가는 길의 동남쪽 구릉 소나무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1~737)의 무덤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본명은 융기이다. 당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37년에 왕이 죽자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 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왕릉 북쪽에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왕릉의 밑둘레는 46m, 높이는 5m이다. 무덤 아랫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는데, 높이 90㎝ 정도의 돌(면석)을 두르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의 조각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무덤 앞쪽에는 석상이 놓여있고 무덤 주위의 4모서리에는 돌사자를 배치하였다. 석상 앞쪽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 각 1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무인석 1개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石人) 1개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에서 보이고 있는 석물의 사실적인 조각기법은 통일신라 초기 양식에 속하며,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서 완비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
경주 신무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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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신무왕릉

신라 제45대 신무왕(재위 839)의 무덤이다. 본명은 김우징이고, 희강왕의 사촌동생이다. 흥덕왕 사후에 왕위 쟁탈전에서 아버지를 도왔으나 패하여 청해진으로 도망하였다가 장보고의 군사를 빌려 민애왕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형상 서북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왕경의 동남쪽인 동방동에 있는데, 능이 있는 구릉 동남쪽 산의 이름이 형제산이다. 높이 3.4m, 지름 15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주변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다.

경상북도 경주시 동방동
경주 헌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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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헌덕왕릉

경주 북천가에 있는 신라 제41대 헌덕왕(재위 809~826)의 무덤이다. 헌덕왕의 본명은 김언승이며,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재위기간 동안에 농사를 권장하고 당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김헌창의 난과 김범문의 난이 일어나는 등 국내정세가 혼란스러웠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26년에 왕이 죽자 천림사의 북쪽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천림사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왕릉의 남쪽에 절터가 있어 이곳을 천림사 터로 본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26m, 높이 6m이다. 봉분 밑의 둘레를 따라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둘레돌은 먼저 바닥에 기둥 역할을 하는 돌을 한단 깔고, 그 위에 넓적한 돌(면석)을 세웠다. 면석사이에는 기둥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다. 탱석에는 무덤을 수호하는 상징적 의미로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는데, 이 무덤에는 현재는 12지신상 중 돼지(해)·쥐(자)·소(축)·호랑이(인)·토끼(묘) 등 5개상만이 남아있다. 둘레돌 밖으로는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설치하고, 둘레돌과 난간 사이 바닥에는 돌을 깔았다. 지금의 모습은 1970년대에 정비된 것으로, 둘레돌의 일부와 돌난간석을 새로 만들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경주 법흥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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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법흥왕릉

신라 23대 왕인 법흥왕(재위 514∼540)의 무덤이다. 법흥왕은 신라를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체제로 완성시킨 왕이다. 왕권강화를 위해 상대등과 병부를 설치하였고, 520년 율령을 반포하였다. 532년 금관가야와 합병하여 낙동강유역에 처음 진출하였다. 신라 처음으로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중국 양[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527년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불교를 국가종교로 수용하고 고대국가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높이 2m, 지름 14m로 삼국시대 신라 왕의 무덤으로는 작은 편이다. 무덤 아래에는 둘레돌을 받쳤던 자연석이 있다. 법흥왕 이전의 왕 무덤은 평지인 경주 무덤들에 밀집되어 있어 소재파악이 어려우나, 그 이후의 왕 무덤은 구릉이나 교외에 2∼3기씩 따로 자리하고 있으며 소재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변화는 왕 무덤의 형태 변화와도 연관되는 듯한데 그 변화의 시작을 법흥왕릉에서 찾아볼 수 있어 중요한 곳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경주 서악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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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서악동 고분군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 바로 뒤편의 구릉에 분포하는 4개의 대형 무덤을 가리킨다. 고분의 모양은 모두 원형이며 주위에 별다른 구조물이 없다. 봉분 가장자리에 둘렀던 둘레돌이 일부 노출되어 있는데, 모두 깬돌을 사용했다. 대부분 냇돌을 쓴 대릉원 일원의 고분들과 차이를 보인다. 내부 구조는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들보다 작은 고분들이 주변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모두 굴식돌방무덤이다. 이들 무덤이 분포한 지형은 선도산에서 서남으로 뻗은 능선상에 있고, 뒷산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사상의 영향하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 첫 번째 무덤은 법흥왕릉, 두 번째 무덤은 진흥왕릉, 세 번째 무덤은 진지왕릉,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릉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경주 지마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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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지마왕릉

신라 제6대 지마왕(재위 112~134)의 무덤이다. 지마왕은 신라 5대 파사왕의 아들로 태어나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았다. 지마왕의 재위 기간에는 신라는 백제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가야와는 낙동강 하류를 둘러싸고 패권을 다투었다. 왜인들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으나 교섭하여 강화를 맺었고, 북쪽에서 말갈이 쳐들어오자 백제의 도움을 받아 물리쳤다. 무덤은 포석정에 남쪽으로 200m 떨어진 남산 서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왕릉 중에서는 작은 편에 속하며, 외형과 입지로 보아 내부 구조는 굴식돌방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건청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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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역사관광

건청궁

건청궁(乾淸宮)은 1873년(고종 10)에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지어진 궁 안의 궁이다. ‘건청’은 ‘하늘은 맑다’라는 뜻으로, 경복궁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민간 사대부 집의 형태를 따르면서 화려하고 섬세한 치장을 가미하여 지었다. 건청궁의 왕의 생활공간인 장안당(長安堂, 오랫동안 평안하게 지냄)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곤녕합(坤寧閤, 땅이 편안함)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장안당과 곤녕합은 복도로 이어져 있다. 이곳에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10년 정도 생활하였다. 그러나 1895년(고종 32) 곤녕합 옥호루(玉壺樓, 옥으로 만든 호리병)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고종은 이듬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후 1909년(융희 3)에 철거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미술관이 들어섰다가 철거된 후 2007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거창 요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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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역사관광

거창 요수정

요수정은 요수 신권 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1542년 구연재와 남쪽 척수대 사이에 처음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805년 후손들이 수승대 건너편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상량문에 1800년대 후반에 수리한 기록이 있다. 요수정은 수승대 건너편 솔숲에 부속건물 없이 홀로 세워진 중층의 정자이며,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면 어칸의 배면에 1칸의 방을 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로 구성하였다. 요수정은 자연 암반 위에 바로 세운 건물로 초석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특별히 기단을 조성하지는 않았고, 배면 쪽에 경계의 표시와 굴뚝을 겸하는 낮은 돌담을 쌓았다. 수승대의 경치를 감상하고, 시회와 교육 등을 위해 솔 숲에 만들어진 전형적인 전통정자 건물로 형태가 매우 아름답다. 산간지역의 기후를 고려하여 정자의 내부에 방을 들이고 있어 이 지역의 건축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은하리길 100
경상좌수영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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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역사관광

경상좌수영성지

경상좌수영성지는 경상도 옛 수군의 본영이었다. 좌수영은 조선시대에 동남해안을 관할했던 군영으로 예로부터 남쪽 지방이 지리적인 요인으로 잦은 왜구의 침략으로 피해를 받자,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부산에는 경상좌수영을, 통영에는 경상우수영을 세워 남쪽의 방위를 책임졌다. 원래 좌수영은 남구 감만동에 있었는데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이전했다가 임진왜란 직전에 현재의 수영동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좌수영성의 축조연대는 정확하지 않고 1692년에 개축한 것이라 한다. 좌수영의 동, 서, 남, 북에는 영일문, 호소문, 주작문, 공진문이라 불리는 4개의 문이 있었으며, 일정한 시각에 폐문루, 관해루에 달아둔 북을 울려 여닫았다. 그밖에 3개의 우물과 4개의 배수구, 옹성, 치성, 보루 등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파손되어 현재는 성벽임을 짐작하게 해주는 돌 터와 홍예문, 배수구, 그리고 성의 존재를 짐작하게 하는 남문만이 자리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성로 43
경주 망덕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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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망덕사지

경주 낭산[狼山]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사천왕사와 마주하고 있다. 처음 지어진 때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라 문무왕 또는 신문왕 때로 전한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목탑터와 그 북쪽으로 금당터와 강당터, 남쪽으로 중문터, 그리고 이를 둘러싼 회랑터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형의 쌍탑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중문터 남쪽에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당간지주(보물)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경주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으로 그 의미가 크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경주 탈해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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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탈해왕릉

경주 동천동에 있는 신라 제4대 탈해왕(재위 57~80)의 무덤으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무덤의 형식 자체는 일반적이나, 신라 초기의 왕릉이고 특히 최초의 석 씨 왕릉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무덤은 높이 4.5m, 지름 14.3m 크기로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봉토무덤이다. 주변에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으며, 겉으로 보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왕릉 초입에는 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전각 숭신전이 있다. 탈해왕은 신라 최초의 석 씨 왕으로 62세에 즉위하여, 24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왜국에서 동북쪽으로 1천 리 떨어져 있는 다 파나 국(또는 완하국, 용성국)의 왕비가 잉태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그 알을 궤에 넣어 바다에 버리니 동해 아진포에 닿았다. 그때 한 할머니가 이것을 열어 보고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다. 배에 까치들이 울며 따라왔으므로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 자를 떼서 석(昔)으로 성을 삼고, 아이가 궤를 풀고 나왔다 해서 이름을 탈해(脫解)라 지었다. 탈해왕은 석 씨의 시조로서 신라 최초 석 씨 왕이 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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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은 경주 손 씨 큰 종가로 이 마을에서 시조가 된 양민공 손소(1433∼1484)가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집이다. 양민공의 아들 손중돈 선생과 외손인 이언적(1491∼1553)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一자형 대문채 안에 ㅁ자형 안채가 있고 사랑채 뒤쪽 높은 곳에 신문(神門)과 사당이 있다. 안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고 사랑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사랑방과 침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ㄱ자형으로 놓여 있는 사랑채 뒤편 정원에는 수백 년 묵은 향나무가 있다. 대개 사랑방은 큰 사랑방 대청 건너편에 작은 사랑방을 두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집은 작은 사랑을 모서리 한쪽으로 두어 방과 방이 마주하지 않도록 한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일종의 마루통로 형식으로 꾸민 점 역시 특이하다. 종가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사랑채 뒤편 정원의 경치 역시 뛰어난데 건물을 지은 수법과 배치 방법들이 독특하여 조선 전기의 옛 살림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위 국가유산은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으므로 참고해야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75-6
거창 황산마을 옛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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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역사관광

거창 황산마을 옛 담장

거창 황산마을은 18세기 중엽에 황고 신수이가 입향하면서 번성한 거창신씨 씨족마을로 마을의 생성은 16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조선시대 영조 이후 인물이 연이어 배출되었다고 전해진다. 마을 어귀에는 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폭 5m 이상, 높이 15m 이상의 수령 600년에 달하는 고목이 자리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이 고목을 안정좌 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은 대체로 평탄하며 마을 동측에 흐르는 호음천을 중심으로 큰땀과 동촌으로 구분되어 있다. 마을 내 주택들은 대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한말과 일제강점기 지방 반가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며 규모와 형식면에서 월등함을 보여주는 시도민속자료 거창 황산마을 신씨고가 등의 지정문화유산은 전통마을로서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마을 전체는 약 50여호로 거의 안채와 사랑채를 갖추고 있으며 이렇게 한 마을 전체가 모두 기와집으로 무리지어 있는 것은 이른바 씨족부농촌으로 소작마을을 별도로 두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담장은 대개 토석담으로 담 하부 2~3척 정도는 방형에 가까운 제법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진흙을 사춤하지 않고 대부분 메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이는 도로보다 높은 대지 내 우수를 담 밖으로 자연스럽게 배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자연석으로 메쌓기 한 위에는 하부의 자연석보다 작은 20㎝ 내외의 돌을 담 안팎에 사용하여 진흙과 교대로 쌓아 올렸고 대부분 담장 상부에는 한식기와를 이었으며 또한 근년에 쌓은 담장은 기존 담장과 달리 엇쌓기를 하였다. 마을의 시한당 앞 연못은 일반적인 한국 전통의 연못양식인 방지원도형이 아닌 원지방도형으로 구성되어 있어 독특하다. 전반적으로 전통고가와 어우러진 활처럼 휘어진 전통 담장길은 매우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1길 109-5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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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경주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 이 석불들은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三尊佛]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본존불은 머리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표면이 매끄럽게 표현되었다. 어린아이 표정의 네모난 얼굴은 풍만하며,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을 통하여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佛性]을 표현하고 있다. 목이 표현되지 않은 원통형의 체구에 손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는데,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올리고 있다. 묵직해 보이는 옷은 불상을 전체적으로 강직해 보이게 하지만, 어린아이 같은 표정과 체구 등으로 오히려 따뜻한 생명을 실감 나게 표현하고 있다. 왼쪽의 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가는 허리를 뒤틀고 있어 입체감이 나타난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 보병[寶甁]을 잡고 있는데, 보관에 새겨진 작은 부처와 더불어 이 보살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오른쪽의 보살 역시 잔잔한 내면의 미소를 묘사하고 있는데, 무겁게 처리된 신체는 굵은 목걸이와 구슬장식으로 발목까지 치장하였다. 조각솜씨가 뛰어난 다정한 얼굴과 몸 등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가 풍기고 있는 작품으로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신문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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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신문왕릉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의 무덤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로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옛 백제와 고구려 백성을 융합하는데 힘썼다. 국립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고, 귀족들의 기반이 되면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였다. 지방을 통치하기 위해 전국을 아홉 개의 주로 나누고 중요한 거점 다섯 곳에 소경을 설치하였다. 신문왕이 죽은 후에는 낭산 동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낭산 남쪽 끝자락에 있다. 무덤은 높이 7.6m, 지름 29.3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가장자리의 둘레돌은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었다. 바깥쪽 사다리꼴 모양의 석재를 받쳐 놓았다. 정남쪽에 배치한 받침석의 윗부분에 ‘문(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이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널길 입구라는 것을 표시한 듯하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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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역사관광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

금귀봉의 동남쪽으로 뻗어있는 산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는 무덤으로 이 일대는 석장골 또는 재궁골이라 불리던 곳이다. 고분의 모양은 능선 상의 좁은 평지 위에 방형으로 지대석을 설치하고 그 위에 호석을 올려놓고 봉토를 쌓은 방형호석 형태이다. 석축의 동쪽, 서쪽에 2구의 석인이 있는데 동쪽 석인은 두관을 착용한 문인석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형상이다. 서쪽의 석인은 가슴 윗부분이 절단되고 하반신만 남아 있으나 동편과 비슷한 형태로 보인다. 근처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일반인들의 무덤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며, 둔마리고분은 발견 당시에는 파괴가 심하였으나 지금은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무덤 내부 구조는 상자형 쌍돌덧널로 먼저 땅을 판 후 판석으로 벽을 두르고 그 안에 덧널을 설치한 굴식돌방무덤으로 서쪽에 있던 덧널에는 나무로 만든 널이 1개가 들어 있었으며 동쪽 돌덧널은 비어 있었다고 한다. 양쪽 돌덧널 모두 벽면에 회칠을 하고 흑·녹·갈색으로 인물을 그린 벽화가 있고, 동쪽 돌덧널의 동쪽 벽에는 선녀 6명의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북쪽 벽에 글자가 희미하게 나타나 있다. 서쪽 돌덧널의 서쪽 벽에는 여자 두 명, 남자 한 명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벽화의 내용은 악기 연주 그림으로 붓의 움직임이 자유롭고 생기가 있으며, 불교의 사상이 중심이 되면서 도교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
거창 황산리 신씨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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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역사관광

거창 황산리 신씨고가

조선 연산군 7년(1501)에 요수 신권이 이곳에 들어와 산 이 후, 이 마을은 거창 신씨의 집성촌으로 번창해 왔다.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이 집은 1927년 신도성이 건립한 근대기 주택으로 원학고가라고도 부른다. 당시 이 집의 주인은 큰 지주였다고 하는데, 이 집은 그러한 집주인의 경제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모두 경남 지방의 일반적인 주택 양식인 홑집 대신에 겹집의 팔작지붕으로 지어 집주인의 부와 권위를 드러내고 있으며, 사랑채는 궁궐이나 절에서 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장식물로 꾸몄다. 잘 다듬은 커다란 돌로 쌓은 받침돌과 기둥을 받친 주춧돌 위에 설치한 기둥 자리 등은 조선 중기 이전에는 벼슬이 높은 양반 집안에서도 보기 힘든 모습이다. 그 밖에 안채와 그 건물을 둘러싼 크고 화려하게 지은 부속건물들도 집주인의 경제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안채의 늘어난 방 수, 좁아진 대청, 집안에 들어선 화장실 등은 전통의 격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20세기 초 실용성을 중시하던 가옥의 변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1920년대에 지어진 이 가옥은 격식의 해체, 실용성의 증가, 심화된 경제적 계층화 등 복합적인 사회 현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1길 109-5
경주 이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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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이견대

대왕암을 의미 있게 눈여겨볼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다. 대본 초등학교 앞쪽에 있는 이견대와 동해구(東海口)라는 표지석 아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서 있는 자리이다. 이견대는 화려한 능묘를 마다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곳이며 그의 아들 신문왕이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배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초석에 근거하여 최근에 지은 것이다. 동해구 표지석 아래로 내려가면 우현 고유섭 선생의 반일 의지를 기리기 위해 1985년 제자들이 세운 기념비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가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명백한 침략을 내선 합일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우격다짐에 쐐기를 박듯,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왜구의 침략을 경계한 문무왕의 호국의지를 돌이켜 생각하며 고유섭이 지은 ‘대왕암’이라는 시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대왕암이 바라다 보이는 자리에 나란히 세워져 있어 뜻이 더 깊다.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밑길 12-14
경주 구정동 방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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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구정동 방형분

경주 구정동 방형분은 경주에서 불국사로 가는 길의 북쪽 구릉자락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무덤이다. 이 방형분은 한 변의 길이가 9.5m 높이가 2m이다. 무덤의 형태는 정사각형이고 흙을 덮어 만든 봉분 아래에는 무덤을 보호하는 의미를 갖는 12지신상이 조각된 둘레돌이 배치되어 있다. 둘레돌을 배치하는 것은 삼국시대 이후부터 내려오는 전통인데, 통일신라시대 경주지방의 왕릉에서는 12지신상을 조각한 둘레돌을 흔히 볼 수 있다. 무덤 내부에는 봉분의 남쪽으로 치우쳐 직사각형의 상자형으로 축조된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있다. 시체를 모신 널방(현실)의 동쪽 벽에는 널길(연도)이 나 있다. 유물로는 금동관장신구·은제띠고리·은제행엽 등이 출토되었다. 둘레돌의 배치, 돌널(석관)의 사용, 12지신상의 조각 수법 양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기의 최고 귀족층 무덤으로 생각된다. 신라 무덤 중 유일한 네모무덤으로, 그 계통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전기에 나타나는 둘레돌을 갖춘 네모무덤의 선구적 모습으로 평가된다.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15-5 (구정동)
경주 원성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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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원성왕릉

원성왕릉은 낮은 구릉의 남쪽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 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이 있는데, 이 돌에 12 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두 쌍·문인석 한쌍·무인석 한쌍과 무덤을 표시해 주는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성왕릉의 무덤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둘레돌에 배치된 12 지신상과 같은 세부적인 수법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이다. 또한 각종 석물에서 보이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신라인의 예술적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출처 : 경주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신계입실길 139
경주 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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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나정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전설을 간직한 우물이다. 박혁거세를 기리는 유허비를 비롯해 신궁터로 추정되는 팔각건물지, 우물지, 담장지, 부속건물지, 배수로 등이 남아 있다. 특히 팔각건물지는 한 변의 길이가 8m나 되고 네모난 담장을 두른 것으로 보아 신라의 신궁터로 추정되며 이곳 나정을 박혁거세를 제사 지내는 신전으로 짐작할 수 있다. 와 에 나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 건국의 주역인 6촌의 촌장들이 모여 군주를 선출하고 도읍을 정하자고 결정한 뒤 일행이 높은 곳에 올랐다. 그런데 양산 아래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이상한 기운이 돌며 백마 1마리가 무릎을 꿇고 있어 가보니 백마는 하늘로 올라갔고 붉은색의 커다란 알만 남았는데 이 알을 쪼개자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다고 한다. 이상히 여겨 동천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고 새와 짐승들이 춤추듯 노니니 천지가 진동하며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고 한다.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성을 박(朴)이라 하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고 하였다. 아이가 13살이 되던 해인 BC 57년 왕의 자리에 올라 나를 세우고 서라벌이라고 이름지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경주 배동 삼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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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배동 삼릉

경주 배동 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졌다.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 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덕왕릉이라 전해오는 가운데의 무덤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당하여,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임을 확인하였다. 무덤에는 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세워 놓은 것처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으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있다. 경주 배동 삼릉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 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 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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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시역사관광

경앙사

경앙사는 오진영 선생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노주 오희상을 비롯해 간재 전우, 석농 오진영 선생의 학덕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다. 매년 음력 3월 10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건물은 총 26㎡(8평)로 겹처마 맞배지붕의 한옥이며, 홍살문, 삼문, 사당 등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특히 현판 액자는 석농의 제자인 월헌 이보림 선생이 썼다고 전해지는데 여기서 경앙은 ‘산은 사람을 우러러보고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므로 천하만인에게 존경받는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오희상 선생은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었고, 정조 24년(1800) 세자익위사 세마가 된 후 여러 차례 벼슬을 하다가 사직하고 광주 징악산에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힘썼으며 사망 후엔 헌종 7년(1841)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전우 선생은 경전을 깊이 연구해 당대 최고의 학자라는 평을 들었으며 을사늑약 때 을사오적의 참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를 전하지도 못하자, 다음을 기약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의병운동과 3·1 운동 등 항일운동이 거셌던 시기라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계화도에서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6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오진영 선생은 전우 선생의 제자로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각국의 공관과 정부에 부당함을 알리는 글을 보냈으며, 이수홍과 파리 만국회의에 보낼 공문을 작성하였으나 전달에 실패했다. 1938년 화양동 만동묘 철거를 반대하고 추담별집을 간행, 배포했다. 흰옷과 검은 갓으로 끝까지 항일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경주 동궁과 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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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동궁과 월지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 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푼 장소이다. 신라가 멸망한 후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와 기러기 안과 오리 압을 써서 예전엔 안압지로 불렸으나 1980년대 이곳에서 월지-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고 삼국 통일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 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지는 내용으로 보아 이곳이 신라시대 때 월지라고 불린 장소로 확인되어 2011년에 경주 동궁과 월지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 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 터로 보이는 3곳과 월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중 보상화 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월지는 신라 원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서 연못 가장자리에 굴곡을 주어 어느 곳에서 바라보아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예지가 돋보인다. 동궁에는 임해전을 비롯해 총 27동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현재는 3채만 복원되었고 그 건물을 비추는 화려한 조명과 월지에 반사된 모습은 경주의 대표 야경명소로 뽑힌다.

경상북도 경주시 원화로 102
건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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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역사관광

건봉사

금강산 건봉사는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감로봉 동남쪽 자락에 자리한 오래된 사찰로, 석가모니의 치아 진신 사리를 모시고 있다. 한때 3,183칸에 달하는 대규모 사찰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불이문만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1994년부터 복원 작업을 시작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승려들이 승병을 조직한 곳이자 일제강점기 때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호국사찰이기도 하다. 신라 법흥왕 7년(520)에 승려 아도가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승려 발징이 절을 고쳐 짓고 1만 일 동안 염불을 외우며 수행하는 만일회를 열었으며, 이 모임은 우리나라 염불만일회(극락정토의 왕생을 기원하며 만일동안 염불하는 불교 의식)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나옹화상이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조선 세조 2년(1456)에 임금이 행차하여 이곳을 왕실의 안녕을 비는 왕실 원당(개인의 안녕이나 명복을 빌기 위해 위패나 초상화를 모신 사찰 혹은 사찰 내 전각)으로 삼고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어실각을 지으며 큰 사찰이 되었다. 조선 고종 15년(1878)에 불이 나 모두 타버려 이듬해 다시 고쳐 지었다. 대한제국 광무 10년(1906)에 개화사상 및 신문물 교육을 위한 봉명학교를 설립하여 관동지역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되었다. 1911년에는 9개 말사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되는 등 규모를 회복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고성지역에서 약 2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면서 1920년에 건립된 불이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무너지고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건봉사 터는 휴전 하며 민간인 통제선 북쪽에 속하게 되었다가 1989년부터는 민간인 출입이 가능해졌다.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
경주 포석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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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포석정지

경주 남산 서쪽에 있는 포석정은 왕이 술을 들면서 즐길 수 있도록 마련된 별궁의 하나였으나,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조성연대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6) 때로 본다. 규모는 폭이 약 35㎝, 깊이 평균 26㎝, 전체 길이가 약 10m이다. 포석정은 중국 고대 강가에서 초혼제를 지내고 악귀를 쫓는 행사의 하나인 유상곡수연에서 유래하였다. 353년 중국의 왕희지가 쓴 난정서문에 보면 맑은 시냇물을 아홉 구비로 돌아 흐르게 하여 흐르는 물속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게 하되 술잔이 아홉 구비를 다 지날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벌술 3잔을 마시게 하였다. 유상곡수를 즐기는 주위는 높고 험한 산이 있고, 숲과 대나무숲이 있으며 옆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한다. 이에 신라에서도 험한 남산 봉우리를 뒤로 하고 죽림과 송림이 울창하고 맑은 시내가 흐르는 계곡에 포석정을 만들었던 것이다. 원래는 남산계곡에서 흘러 들어오는 입구에 거북 모양의 큰 돌이 있었고, 그 입에서 물이 나오도록 만들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져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고 삼국유사에 헌강왕이 이곳에 와서 남산 신의 춤을 따라 해 어무상심무를 만들었다 한다. 또한 이곳은 인간의 마음을 수양하고 화랑이 정신을 도야하며 시문을 짓고 속세를 떠나 유정을 느끼던 아름다운 장소였다. 927년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며 놀고 있다가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붙잡히게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신라 천 년 역사의 치욕이 담긴 장소이기도 하다. 화랑세기필사본에서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社)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1998년 남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면서 이곳에 규모가 큰 건물이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제기류도 출토되어 포석정이 연회를 즐기던 곳이 아니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을 거행하던 신성한 장소였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입구 포석정지 방문자센터에서는 포석정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모형과 영상물을 상영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석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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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석빙고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경주 김유신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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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역사관광

경주 김유신묘

경주시 충효동 옥녀봉 능선에 위치한 김유신 장군의 묘로 674년(문무왕 14) 축조되었다. 김유신은 신라의 장군이자 재상으로 삼국을 통일한 공로가 컸으므로 문무왕은 비단 1,000필, 벼 2,000석을 내리고 군악고취 100명을 보내어 장사를 지내게 하며 비를 세워 공적을 새겨두고 수묘하는 백성을 배정해 주는 등 최고의 예를 베풀었다. 후에 흥덕왕대에 그를 흥무대왕으로 추봉하였다. 봉분은 30m에 달하는 큰 원형분으로 둘레에는 24장의 호석과 돌난간을 둘렀고 호석과 돌난간 사이의 바닥에는 돌을 깔았다. 그 무덤의 양식 또한 왕릉이나 다름없는 규모와 형태이다. 호석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는데, 대개의 경우 능을 지키는 수호신으로는 갑옷을 입은 조각들이 새겨져 있으나 김유신 묘의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몸체는 정면을 보고 서 있으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주시하는 모습이 이색적이며 무장을 하지 않아 매우 온화해 보인다. 경주왕릉에는 몇 군데 지신상조각이 있으나 조각의 우수함이나 상의 거대함으로는 김유신묘를 따를 수 없다. 면적 1만 4143㎡로 경주시에서 관리하며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묘역에는 김유신장군의 위패를 모신 금산재의 비각이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2길 44-7
강경역사문화안내소(구 강경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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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시역사관광

강경역사문화안내소(구 강경노동조합)

구 강경노동조합은 1925년에 건립된 근대 건축물이다. 강경은 금강을 거쳐 서해와 연결되고, 내륙으로도 접근하기 쉬워 일찍부터 상권이 발달한 도시이다. 그러한 이유로 강경시장은 평양,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으로 손꼽혔으며, 강경포구는 원산포구와 함께 전국 2대 포구로 불릴 만큼 각종 해산물과 공산품의 거래 및 이동이 활발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창구로써 1920년대에 이르러 내륙의 수산물 유통은 대부분 강경포구를 거쳐 전국으로 운송될 만큼 번성하였다. 당시 강경노동조합은 조합원의 수가 2,000~3,000명에 달하였고, 하루 약 200여 척의 배가 하역 작업을 할 만큼 활성화되었다. 강경노동조합 건물은 1925년 당시 조합장인 정흥섭이 개인 재산 5,000원을 들여 한식 목조건물로 조합 사무실을 지은 다음, 같은 해 10월 3일에 완공하였다. 당시 건물은 바닥 면적 70.08㎡의 2층 구조로 연면적 140.16㎡ 규모였고,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1층 전체를 개방하여 사무공간으로 사용하였다. 강경노동조합은 1953년에 전국부두노동조합 강경지부 연맹체제로 바뀌었고, 이후 강경연락소로 축소되었다가 결국 해체되었다. 강경노동조합 건물도 1935년 이후 본래 용도와 상관없이 공장, 창고 등으로 사용되었는데, 1940년대 사진 자료를 보면 건물 모습이 현재와 같은 단층 구조로 바뀌게 된다. 이는 노동조합의 쇠락과 연관 지어 이해할 수 있다. 강경노동조합은 국가등록문화유산인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 강경 갑문, 강경 채운산배수지 등과 함께 근대 강경의 번성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이다.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옥녀봉로27번길 30-5
강경 중앙초등학교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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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시역사관광

강경 중앙초등학교 강당

강경 중앙초등학교 강당은 1930년대에 붉은 벽돌을 쌓아서 만든 건축물이다. 강경중앙초등학교는 논산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학교이자 졸업생 기수로 충남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이다. 1905년 4월 2일에 2년제 사립학교인 보명학교로 개교한 이래, 1907년 4년제 강경공립보통학교, 1938년 강경중정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강경중정공립국민학교, 1946년 강경중앙초등학교로 여러 차례 학교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당은 1937년 6월 30일에 세워진 지상 1층의 건물이다. 이 건물은 강경공립보통학교 개교 30주년을 기념하여 강경공립보통학교 후원회에서 기증한 것이다. 콘크리트 기초 위에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지었고, 외벽 둘레에는 콘크리트로 흰색 띠를 둘러 두 층높이로 나누고, 모서리에는 벽돌 내어쌓기 방식으로 띠를 둘렀다. 이 건물은 당시 강당 건축의 전형적인 특징을 따르는데, 건물에 흰색 띠를 둘러 입면의 단조로움을 없애 단아한 멋을 보여준다.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옥녀봉로 8
강경 구 연수당 건재 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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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시역사관광

강경 구 연수당 건재 약방

강경 구 연수당 건재 약방은 1920년대 강경시장 전경 사진 중에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강경의 하시장(下市場)을 중심으로 했던 번성시기에 시장 중심에 위치하여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건축당시 ‘남일당(南一堂) 한약방’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건축주가 바뀌면서 ‘연수당 건재 대약방(延壽堂 乾材 大藥房)’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운영되었고, 현재는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 지상 2층 규모의 한식 목조 건물로 지붕은 우진각 기와지붕이며, 지붕내부의 상량문을 통해 1923년(癸亥年 八月 五日 酉時 立柱上梁)에 준공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건물은 근대 한옥 변천사적으로 가치가 높다.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옥녀봉로24번길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