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불암
해인사 고불암은 1200년 역사를 가진 해인사의 산내 암자로서 해인사 암자 중 가장 높은 해발 900m에 법당이 있으며, 전체적인 건축구조와 형상이 산내 암자 중 해인사와 가장 비슷하며 전통적인 목조건물과 현대적인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통사찰식 목조건물은 법당을 중심으로 양옆에 육화당, 벽안당이 있고 앞으로는 고불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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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고불암은 1200년 역사를 가진 해인사의 산내 암자로서 해인사 암자 중 가장 높은 해발 900m에 법당이 있으며, 전체적인 건축구조와 형상이 산내 암자 중 해인사와 가장 비슷하며 전통적인 목조건물과 현대적인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통사찰식 목조건물은 법당을 중심으로 양옆에 육화당, 벽안당이 있고 앞으로는 고불루가 있다.

경주 시가지 중심부에 신라 이후의 천년 경주를 상징하는 주요 유적인 경주읍성이 자리해 있다. 신라 시대에는 월성이 중심이었다면 고려 이후에는 경주 읍성으로 중심이 옮겨졌다. 고려와 조선에 이어지기까지 행정, 생활, 군사기능이 모여 있던 경주의 심장부였다. 고려 시대에 처음 축조된 이래, 조선 시대에 여러 번 고쳐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 복원된 모습은 조선 영조 21년(1745)에 중수한 모습이다. 영조 때 중수한 경주읍성은 성곽 둘레가 2.3㎞에 달했고, 동서남북에 성내로 통하는 사대문이 자리했다고 전한다. 사대문은 모두 소실되었는데, 동문인 향일문을 최근 복원하였다. 동쪽에 100여 미터 남짓 남아 있던 성벽을 이어 쌓고, 치성, 옹성, 동문 등을 복원해 2018년 11월 일반에 공개했다.
경천묘는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에 있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영정을 모신 묘우이다. 신라 말 927년에 경순왕은 왕위에 올랐으나 신라는 이미 사직을 본전할 힘이 미약한 상황이었으므로 935년(경순왕 9년) 이미 운명이 다한 신라의 형편을 신하들과 논의한 끝에 고려에 넘기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 후 경순왕은 두루 다니다가 이곳 용화산(현 미륵산)의 빼어남을 보고 그 정상에 올라 미륵불상을 조성하고, 그 아래에 학수사와 고자암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경순왕이 돌아가시자 왕을 추종하던 신하와 불자들이 고자암에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받든 것이 영정각의 시작이었다. 고려 중기 이후 전각은 무너지고 인적도 끊어졌다가 조선 초에 이색, 권근 등에 의해 전각이 다시 지어졌다. 숙종 때 원주목사 김필진이 새로 초상화를 그리고 전각을 지어 모셨으나 화재를 당했고, 영조 때 재건되면서 임금이 영정각의 명칭을 경천묘로 바꾸었다. 그 후 경천묘는 다시 불태워졌으나 경순왕이 머물렀던 유래에 따라 신라 문화를 지켜낸 왕의 충정을 기리고자 원주시가 2006년 9월 이곳 미륵산 아래에 경천묘를 복원하였다. 외곽의 진입문은 평삼문으로 되어 있고 사당 진입문은 솟을삼문으로 되어 있는데 당우는 조선후기 익공양식으로 되어 있다.
고진하 가옥은 강원 영월군 남면에 위치한 곳이다. 뒤로 병풍처럼 산을 등지고 있으며, 영서와 중부 지방의 민가 형태를 보이고 있다. 가옥의 평면구조는 외형상 서로 붙어 있는 안채와 사랑채가 ‘ㄷ’ 자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헛간채가 일자형으로 배치되어 중정형의 마당을 갖고 있다. 영월 남면에 원골다리를 지나 도동마을과 원골마을 지나 위치한 고진하 가옥은 뒤로는 푸른 산자락을 등지고 앞으로는 밭을 두고 있으며, 마을길 방향으로는 사랑채가 전면을 드러내고 있다. 사랑채의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약간 낮은 물매의 차분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가져 주변 산새와 잘 어우러지고 있다.

중동성당은 공주 지역 최초의 천주교 성당으로 1897년 설립됐다. 초대 신부로 프랑스 선교사 기낭이 부임했으며 1921년 제5대 주임으로 부임한 최종철 신부가 새 성당 건립을 계획해 1937년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이후 강당 ‘천사의 집’, 새 사제관과 수녀원을 완공했고, 1997년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성당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했으며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중동성당은 전통 목조 건축에서 현대건축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고딕양식의 건축물로 평가된다. 본당의 평면은 라틴십자형, 건물 외관은 붉은 벽돌로 마감했다. 중앙 현관 꼭대기에는 높은 종탑이 있으며, 현관 출입구와 창의 윗부분은 뾰족한 아치로 장식돼 있다. 인근에 국고개 문화거리와 충남역사박물관 등 볼거리가 풍부해 당일치기 코스로 좋다.

공주 중학동에 자리한 구 선교사가옥은 미국 감리교회 소속 선교사 사택으로 건립됐다. 20세기 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공주에서 선교사들이 선교 사업을 벌인 것은 물론이고 개교 100주년을 맞이한 영명학교가 교육을 시작한 상징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3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로 계단실과 각층 공간이 스킵플로어 형식으로 연결돼 있다. 구 선교사가옥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됐으며 공주 기독교 역사위원회에서 지정한 유관순의 길에 포함돼 있기도 하다. 열사가 다니던 영명학교, 태극기를 인쇄해 독립운동을 했던 공주제일감리교회를 방문하는 것은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구로구 고척동에 있는 청동기시대 무덤이다. 고척고등학교 뒷산 삼국시대의 토성인 신정리 토성 경내에 있다. 이 고인돌은 1998년 서울대 조사단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는데 그 후 실시된 관련분야 교수들의 조사에서 덮개돌의 주변에 덮개돌과 동일한 형태의 돌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또한 규모는 크지 않지만, 돌방이 확인되었으며, 굄돌 등의 배치 상황으로 미루어 고인돌로 추정케 한다. 고척동 고인돌은 구로구에서 유일한 고인돌로서 주변의 고척동 유물산포지 등과 더불어 청동기시대 주변 지역 일대의 문화상 이해에 좋은 자료가 된다. 이곳은 구로올레길 코스에 있으므로 가볍게 산책을 하면서 함께 둘러보는 것도 좋다.

고성 문암리 선사유적은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구릉지대의 남쪽사면 사구위에 형성되어 있는데 인근에는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어 여러 시기에 걸쳐 형성된 유적이다. 1998년 12월부터 1999년 3월까지 문화재청 국립 문화재연구소에서 전체 유적 중 약 200여평의 발굴조사를 한 결과 5개의 유물 포함층과 3개의 신석기시대 문화층이 퇴적되어 있음을 확인하였고 3기의 주거지와 야외 노지 등 다양한 유구가 발견되었다. 한반도 동북지방과 중국의 동북 3성 지방, 러시아 아무르강 연안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의 신석기 문화와 한반도 선사인의 원류 및 이동경로, 당시의 문화계통과 전파 정도 등을 밝히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문암리 선사유적은 고성 여행지 중 가장 정적인 곳이다.

쌍충사는 충열공 이대원과 충장공 정운을 배향하는 사당이다. 이대원은 1587년 녹도만호로서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적을 맞아 전과를 올렸고 손죽도 해상에서 순절하였다. 정운은 유성룡의 천거로 1591년 녹도만호로 부임했고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과 함께 옥포·한산해전 등에서 선봉장으로서 전과를 올리고 몰운대에서 순절했다. 쌍충사는 1605년 이대원의 아들인 이대상이 세웠으며, 1990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지어졌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내부에는 이대원과 정운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쌍충사는 봉암리 해안가 높은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어 소록도와 녹동항, 녹동항 바다정원이 바로 보이며 이곳을 둘러본 후 뒷문으로 나가면 공원형식의 녹도진 성지가 있다.

조선 중종 38년(1543년) 심광형이 이 지역 유림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로서 ‘호연정’이라고도 한다. 증손자 심민각이 오래된 정자를 옛 터 아래쪽으로 옮겨 다시 지었으며 5대손 심세익이 고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80년에 수리를 한 것이다.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구성은 마루 1칸을 3면을 터 만들었고 2칸 반은 방으로 꾸몄다. 나머지 오른쪽 반 칸은 바닥을 한 단 높여 쪽마루를 두었다. 정자 아래로 흐르는 섬진강, 울창한 숲, 멀리 무등산이 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약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심광형이 세운 군지촌정사(중요민속자료)가 있다. 당대 학문을 익히던 선비들의 수양지와 휴식처를 빼어난 경치와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암행어사로 많은 일화를 남긴 박문수(1691∼1756)의 제사를 모신 곳이다. 박문수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경종 3년(1723)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에까지 올랐다가 1724년 노론이 집권할 때 파면되었다. 1727년 소론이 집권하면서 다시 기용되어 영남암행어사, 충청도암행어사 등을 거치며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다. 그 뒤 호조참판을 거쳐 병조판서와 영의정에까지 벼슬이 올랐다. 이 건물은 1932년에 세웠으며 안채는 ㄱ자형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사랑채는 5칸 규모이며 一자형 평면을 갖춘 집이다. 재실 안에는 박문수 공이 사용하던 유품과 영정을 모시고 있고 박문수의 손자인 박영보가 쓴 수부정기와 박문수 일대기 등의 전적을 보관하고 있다. 1990년에는 원래 재실이 있었던 자리에 새로 재실을 지었다.

공주 정지산 유적은 1998년 7월 28일 충청남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국립공주박물관의 발굴조사 실시 결과 국가차원의 제의시설로 추정되는 중요 유적으로 평가되어 2006년 11월 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백제의 왕실제사유적으로 공주 송산리 고분군(公州宋山里古墳群:사적)과 인접한 곳에 있다. 시설물은 기존의 가옥을 모두 철거한 후 능선을 깎아내고 넓고 평탄한 대지에 만들어졌으며 공산성이 바라보이는 남동쪽으로는 약 세 겹 내지 다섯 겹의 나무울타리를 돌리고 송산리 고분군 쪽으로 연결되는 능선에는 약 1m 내외의 좁은 출입구만 남긴 채 너비 5m, 깊이 2m 이상의 넓고 깊은 도량을 파고 내부에 몇 채의 건물을 축조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화려한 장식이 부착된 장고형 그릇받침 등 국자세자와 관련된 유물이 수집되었다.

고령안화리암각화는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암벽에 새긴 바위그림으로, 가로 115㎝, 세로 90㎝의 바위 면에 쪼기 수법으로 3개의 그림을 새겨 놓았다. 먼저 U자형 반원을 기본으로, 좌우에 활모양의 선을 대칭되도록 그렸으며, 오른쪽 그림에는 작은 구멍을 팠다. 그림의 위쪽 절벽의 바위 면에도 같은 종류의 그림이 2∼3개 더 있는데, 영일 칠포리 암각화와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 해안에 살았던 사람과 내륙에 살았던 사람이 같은 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 국가유산청)

고산서원은 경상북도 울진군 구미마을에 있었던 조선시대 문신 임유후, 김시습, 오도일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1628년 임유후가 이곳에 내려와 고산에 정자를 짓고 20여 년간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의 사후 제자들이 임유후를 추모하기 위해 고산사를 건립하였다. 그 뒤 이곳의 현령으로 부임한 오도일은 김시습이 자주 다녀간 행곡리주천대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동봉별묘를 세우고 구암사라 하였다. 오도일이 죽은 뒤 1715년 고산이라는 사액을 받고 고산서원으로 승격되어 임유후, 김시습, 오도일을 합향하게 되었다. 고산서원은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을 담당하던 중에 훼철되었고 그 후에 다시 복원되지는 못했다. 위패는 땅에다 묻었으며 현재 서원터에는 유허비만 남아있다. 이 서원이 훼철되기 전 경내 건물로는 고산사, 강당, 신문, 동재, 서재 등이 있었다.

이 서원은 18세기 유학자인 문경공 대산 이상정선생을 추모하는 고산서원이다. 1789년(정조 13)에 사림의 공의로 건립되었다. 선생은 25세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퇴계의 학통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연구하는 한편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선생의 문인록에 등재된 제자만도 273인이나 된다. 1882년(고종 19) 이조판서에 증직 되고 1910년 문경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문집 27 책이 있고 이기휘편, 제양록, 퇴계서절요, 사례상변통고, 병명발휘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추었으며. 특히 앙지재와 백승각의 양 끝은 개방된 마루를 두어 주변 경관을 음미하도록 꾸며져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순천시 조례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서원이다. 조선 명종 때의 진사 정소를 추모하고자 숙종 38년(1712)에 순천유림인 조구년, 유책, 임진상 등이 발론하여, 정소의 형 정자와 지우인 조대성을 함께 배향하는 사우로 정소의 유지인 청사헌 자리에 건립하였다. 원래 이름은 정소의 호를 따서 청사사라 하였으며 현 순천시 저전동의 청사헌 자리에 있었다. 1868년의 서월철폐령으로 훼철되어 향사가 중단되었다가 1958년에 향교의 유림대표 조창렬 등과 연일 정씨 정운호 등 후손들이 협력하여 현 위치인 조례동에 사우를 재건하면서 이름을 곡수서원이라 개칭하였다. 청사사우 때와는 달리 재건된 후에는 정소와 조대성만을 향사하고 있다. 곡수서원 앞에 네모난 형태의 아름다운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계송서원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영광군 계송리에 위치한 서원이다. 1966년 향내 유림의 발의로 하동 정간, 미산 정례손 등의 절개와 의리를 추모하기 위하여 현 소재지에 사우를 창건하고, 처음 이를 도내사라하고 제향(각종 제사 의식) 해 오다가 후에 계송서원이라 개액하였다. 향사는 음력 2월 20일과 8월 20일에 모신다. 주변 관광지로는 우산근린공원, 영광예술의 전당, 영광 스포티움, 영광향교, 물무산 등이 있다.

공의로 김지대(1190~1266)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현재의 경상남도 밀양군 청도면 두곡리에 남계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사당의 명칭을 충효사라 하고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을 담당하다가, 고종 51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위패는 뒷산에 묻고 단을 세워 향사하다가, 1907년에는 후손들이 강당인 쌍수당을 중건하기도 하였다. 그 뒤 전라북도 무장향교 관내 유생들이 발의하여 1982년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고, 명칭을 계산서원이라 하였다. 서원 내에는 사당인 상충사 3칸, 강당인 경의당 4칸, 감모재 5칸, 내삼문, 정문인 쌍수문, 고직사 등이 있다.

고로서원은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호계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세운 정분(鄭苯)과 정지산(鄭之産)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1924년에 제각(祭閣)인 경모재(敬慕齋)를 축성하였고, 1931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 이때 우연히 부여의 외산(外山)에서 정분의 영정을 발견하자 이를 모사하여 사당에 모시게 되었다. 1982년 정분의 충과 정지산의 효를 기린다는 의미에서 후손들이 충효사라고 명명하였으며, 1994년에 공주 유림과 후손들이 사우와 삼문을 세워 고로서원(古老書院)이라 명하고 정분을 주향으로, 정지산을 종향으로 모시게 되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이고, 30칸의 담장이 둘러져 있다. 지금은 사곡면의 진주정 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고로사라는 절을 개조하여 재실로 이용하고 있다.
계담서원은 순흥 안 씨 선조들을 제향 하는 곳으로 괴산군 감물면 계담마을 중심에 위치해 있다. 1824년(순조 24)에 조선 중기의 문신 안명세 선생을 모시는 계담사로 마을 뒷산에 창건했다. 그 후 1865년(고종 2)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1년에 순흥 안 씨 양도공파 종회 안동준 회장과 안병태 선생 등이 인근 지역의 유림과 전교에게 계담사 자리에 고려의 문신 문정공 안축을 주벽으로 조선 세종조 명신 안문숙공과 중종조 안한림공, 선조조 안사촌공, 선조조 안세마공의 5위 사당을 준공하고 앞 층계에 내삼문을 세우고 그 안에 묘우로 세덕사를 건립하여 계담서원을 복원하여 지금에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계담서원은 강서당(학습실)과 학구당(도서관)이 갖춰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계담서원 내 홍살문을 지나면 좌측에 도서관으로 이용하는 학구당이 있다. 2만 5천여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으며 인근 주민들이 언제나 대여 및 열람할 수 있다. 강의실로 쓰이는 강서당에서는 교양과 전통예절, 역사문화, 서예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지금까지 수많은 수강생과 졸업생을 배출해 낸 교육의 장이다.

고산서당은 처음에 서재(書齋)로 건립되었다가 서원과 서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 교육 기관이자 선현을 제향(祭享)하는 공간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곳이다. 건립된 시기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과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가 이곳에서 강론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50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고산(孤山)’이라는 이름도 퇴계에게 요청하여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 서당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되는 등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강학 공간으로써의 역할을 해오다가 숙종 16년(1690)부터 퇴계와 우복을 배향하는 서원이 되었다. 이후 영조 10년(1734)에는 강당과 동재·서재를 새로 지어 서원으로서의 완전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서원 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다가 고종 16년(1879)에 강당만 재건되면서 고산서당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964년에 강당 건물을 중수하였고, 2020년에는 사당과 삼문, 담장을 세워 옛 서원의 모습을 다시 갖추고, 동고 서사선(東皐 徐思選)을 함께 배향하게 되었으나 2021년 12월 20일에 화재가 일어나 강당이 불에 타고 말았다. 사당 담장 안에 세워져 있는 강학(講學) 유허비(遺墟碑)와 강당 뒤편의 두 그루 정자나무는 이 서당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출처 : 행복수성 문화관광)

곤양향교의 창건연대는 명확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으나 곤양군이 세종 원년(1419)에 군으로 승격되었음을 상기할 때 향교도 세종시대에 창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중종(中宗) 25년(1530)에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곤양군조에 의하면 "관원은 군수·훈도 각 1인씩이다."라는 기록을 보아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득강이 곤양군수로 부임한 후 그의 많은 업적 가운데 특히 향학에 힘써 많은 유생)을 길러 내었다 한다. 그 후 명종 1년(1546)에 군수 노진이 부임해 와서 처음으로 정동)에 터를 잡아 문묘를 지었다 하였으므로 이 향교 역시 전학후묘형의 소설위 향교임을 알 수 있다. 현종 4년(1663)에는 군수 박영계가 범동으로 옮겼고, 순조 7년(1807)에는 군수 신오가 부임해 와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서 대성전, 대성문, 명륜당, 동재, 서재, 풍화루 등 9동의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대성전 좌우에 동·서 양무가 없고, 대성전의 위치 또한 명륜당 뒤의 오른쪽에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어 두 영역이 완전히 분리된 배치를 보이고 있다.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과 동·서재가 앞에 있고, 사당인 대성전과 사당 출입문인 내삼문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해 왔으며, 문묘의 위차위패를 모시는 순서)나 향사 등은 모두 사천향교와 같다.

계룡 사계고택은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예학자였던 사계 김장생 선생이 말년에 살았던 집으로 후학 양성과 학문에 전념하던 곳이다. 현재 충청남도 기념물 제1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 2800여 평의 넓은 대지에 남쪽으로부터 대문채·은농재·행랑채·안채, 그리고 그 뒤에 가묘가 일곽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또 안채의 왼쪽 편에 나 있는 협문을 지나면 다시 안별당 건물이 있고 그 앞쪽으로 큰 연못이 있는데 이 주변에는 많은 괴목들이 우거져 풍취를 더 하여 주고 있다. 뒤쪽으로는 왕대산까지 이어지는 사계 솔바람길이 있어 선생의 발자취도 느껴보고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체험을 진행하며 일정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천 와룡산의 고산사 응진전에 봉안된 나한상이다. 나한이란 아라한의 준말로, 소승불교의 수행자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성자를 말한다. 사찰의 기록에 의하면 고산사는 신라 말 고려 초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절에서 수습되는 기왓조각, 청자 조각 등은 고려와 조선 때의 유물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관음보살을 중심으로, 좌우로 배치된 고산사 나한상은 조선 중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나한상은 주로 석고로 만들거나 흙으로 만들었는데, 이 나한상은 돌로 만들어 그 예가 극히 드물다. 제천 고산사 석조나한상군은 충주 신흥사 석조나한상과 더불어 충청북도 북부 지역에 보존되고 있는 자료로서, 충청북도 지역에서 조선시대 나한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와룡산의 고산사 응진전에 모셔진 관음보살상이다. 응진전에 모셔진 관음보살상은 조선 중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에 매우 정제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과 몸체의 각 부분도 균형미가 보인다. 다만 양 어깨가 위축되고 턱이 크게 숙여지는 등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불상 양식을 지닌 탓이다. 사찰에 1920년대에 제작한 중수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신라말 고려초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로 나타난다. 그러나 절에서 발견되는 기와조각, 청자조각 등은 고려와 조선의 유물들이어서 확실하지 않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부향교는 처음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0년(1597)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라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서무, 직사, 내삼문, 외삼문, 홍살문 등이며, 전해오는 유물로는 제기, 제복, 서적들이 있다. 대성전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보다 위쪽에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에 전공을 세운 진무성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호남 유림의 발의와 영남 유림의 협찬으로 고종 19년(1882) 이전에 있던 용강사를 계승하여 건립한 것이다. 진무성은 이순신이 지휘했던 당포해전, 옥포해전 등의 여러 전투와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으며, 난이 끝난 후 선조 32년(1599)에 무과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용강사는 순조 26년(1826)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에 건립되어 진무성 장군 외 3인이 제향 되었으나, 고종 5년(1868) 사원 철폐령에 의해 철폐당한 후 복원하여 무열사라 하였다. 4.5㎞ 거리에 운암산이 있으며, 운암산 중턱의 수도암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이 능은 신라 제32대 효소왕(재위 692~702) 무덤이다. 신문왕(재위 681~692)의 맏아들로서 6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며, 어머니인 신목태후가 8년간 섭정하였다. 효소왕의 재위 기간에 관제를 정비하고 의료 교육기관인 의학을 설립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성을 많이 쌓았고, 왕도에 물품의 유통을 쉽게 하기 위해 시장을 열었다. 효소왕이 죽은 후 망덕사 동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시가지 동남쪽 형제봉의 남서쪽 산자락에 있다. 동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 동생인 성덕왕의 능이 있다. 능의 높이는 4.3m, 지름은 10.3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석을 돌렸으나 현재 몇 개만이 남아있다. 무덤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혼령이 머무는 자리라는 혼유석만이 있다. 내부 구조가 돌방무덤인 것을 확인하였다.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 내 접경지역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한 초소로,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망월평야 남서방향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이 돈대는 바깥벽 측면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망월돈대와 함께 관아에서 관리하던 돈대이다.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해 조선 숙종 5년(1679)에 설치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처럼 돈대의 재작년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보기 드문 예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이다. 원래 경희궁으로 들어가는 문읜 5개로, 정문인 흥화문 외에도 동쪽에 흥원문, 서쪽에 숭의문, 남쪽에 개양문, 북쪽에 무덕문이 있었다. 창건 당시 경희궁은 창경궁 제도를 따라서 규모를 작게 하여 정문도 단층으로 세웠다. 경희궁 근처 얕은 고개를 ‘야주개’라 하였는데, 이는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라 밤에도 빛이나 그 광채가 고개까지 훤하게 비추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흥화문은 원래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서 동쪽인 종로를 향하게 지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들어 1915년에 도로가 확장됨에 따라 흥화문은 원래 위치에서 약간 뒤로 옮겨지면서 문의 방향도 도로와 나란하게 남향으로 바뀌었다.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찰인 박문사를 건립할 때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흥화문을 떼어갔다. 광복 이후 박문사가 폐지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과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그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8년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옛 개양문이 있던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면서 궁궐 정문으로서의 역사성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전북 고창군 수동리에 있는 분청사기 가마터로, 구릉 위 작은 저수지의 경사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으며, 가마벽 부분·도자기 만들던 도구·분청사기 조각들이 널려있다. 그릇은 대접·접시·잔·항아리·큰 사발 조각이 주류를 이루며, 유약의 색은 회청색을 띠고 그릇을 빚던 흙에는 이물질이 많이 섞여 있다. 문양은 연꽃무늬, 물고기 무늬, 모란무늬들이 대범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일부 그릇에 ‘내섬(內贍)’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전라도지방의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널리 발견되는 것으로 관청용 분청사기도 제작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창향교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월곡리에 있던 학당사을 옮겨온 것으로, 조선 중종 7년(1512)에 다시 지었다. 대성전은 선조 38년(1605)에 수리하였고, 1974년에 기와를 보수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고창향교는 이 지방의 향토사 연구에 필요한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다.

경남 고성 장산리 허씨고가는 조선 고종 2년(1865)에 건축되어 허씨 4대 선조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사당과 안사당, 가옥 한 채와 2층 건물로 이루어진 구조로, 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에 걸쳐 건축된 한식 전통가옥과 화식주택이 혼합된 대표적인 가옥으로써, 건축구조형식과 건축재료 및 평면 구성이 복합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건물 배치는 안채, 안사랑채, 바깥사랑채, 솟을대문, 가묘, 광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정면 4칸 초가집의 안채는 퇴락하여 헐리고 초석과 기단만 남아 있다. 안사랑채는 앞면 5칸, 옆면 2칸, 한식토기와의 우진각지붕으로 안채 전면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안사랑채 뒷면의 안마당은 앞면과 사랑 마당으로 구분되어 독립된 대청 공간을 배치한 평면구성을 이루고 있다. 가옥은 1912년에 지은 집이고, 손님 접대나 서재로 사용하고 있다. 2층 건물은 현재 집무실로 사용 중인데, 가옥과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보물인 갑사 철당간·지주는 당을 다는 철깃대와 기둥이다. 당간은 절 앞에 세우는 깃대인데 부처나 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표시하고 사악한 것을 내쫓는 기능을 가진 당이라는 깃발을 달기 위한 깃대이며, 당간지주는 당간을 좌우에서 지탱하기 위한 버팀 기둥을 말한다. 갑사 철당간은 지름 50센티미터의 철통 24개를 이어 놓은 것으로 당간의 높이는 약 15미터이다. 그러나 1893년에 4개의 철통이 부러져 처음보다 낮아졌다. 이 철당간·지주가 만들어진 시기는 갑사가 신라 의상대사가 일으킨 화엄종 10대 사찰 중 하나였다는 점과 받침돌 측면에 새겨진 안상조각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된다. 갑사의 철당간 지주는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당간 형태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노송과 느티나무숲이 우거진 계룡산의 서북쪽 기슭에 위치한 절이다. 공주에서 19㎞ 떨어져 있고, 동학사에서 도보로 3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춘마곡, 추갑사라는 말이 암시해 주듯이 갑사의 가을 단풍은 더없이 아름답다. 삼국시대 초기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에 고구려에서 온 아도 화상이 창건하였다. 갑사는 계룡 갑사, 갑사, 갑사사, 계룡사 등으로 불려 왔으며, 통일신라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였던 명찰이다.
고창군 무장면에 있는 무장객사는 조선시대 무장현에 내려온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조선 선조 14년(1581)에 건립되었다. 본관에 걸린 궐자를 새긴 나무 패는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과 지방관리들은 여기에 경의를 표했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면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축하의식을 행하였다. 본관은 돌을 쌓고 그 위에 세운 것으로 계단에 새긴 호랑이, 구름 등의 조각이 운치가 있다. 좌우 건물의 지붕이 본관보다 낮은 점은 격을 낮추기 위해서이다. 이 객사의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초석 석재 하부는 네모지게 상부는 반구형으로 다듬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것 외에 별다른 특징은 없다. 건물 정면의 정원이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객사 건물은 면사무소로 사용하면서 일부 형질을 변경했던 것을 1990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무장객사 뒤편에는 무장수령이 관아를 통치하던 관청의 건물인 동헌이 위치해 있어 함께 둘러볼 수 있다.

무장읍성은 1417년 무장진의 병마사에 마을을 다스리는 기능을 주어 무장진 병마사 김노가 쌓은 길이 약 1.2㎞의 평지성이다. 읍성의 남문인 진무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동문터도 잘 남아 있다. 성 주위를 둘러싼 물길인 해자는 폭 4m, 길이 574m 정도로 그 흔적만 남아있다. 성 안의 건물로는 객사, 동헌이 있다. 에 의하면 읍성의 둘레는 1,470척(약441m), 높이 7척(약 2m)이며 해자의 둘레는 2,127척(약 638m)이고 문은 2개가 있으며 성의 규모를 넓혀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흙으로만 축조된 토성으로 알려져 왔던 이 성이 공사 때 성벽 동쪽 끝부분의 단면이 드러났었는데 성곽일부가 흙과 돌을 섞어서 축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1915년에 발견된 에 의하면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0,000여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 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 전한다. 한편 1894년 일어났던 동학 농민혁명은 이곳 무장읍성에서 맨 처음 봉기하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무장읍성은 조선시대 옛 읍성의 모습을 연구하고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