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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역사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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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초기화
국형사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1유형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역사관광

국형사

원주시 행구동에 위치한 국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로, 신라 경순왕 때 무착대사가 창건하였다. 원래 이름은 보문암이었으나 방어로 발음이 변하여 고문암(古文庵)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곳에 동악신(東岳神)을 봉안하고 제단을 쌓았으며, 해마다 나라의 평화와 풍요를 기원하며 제향을 올렸으므로 국향사라 불렸다. 또한 일 설에는 조선 정종의 둘째 딸 희희공주의 병이 이 절에서 백일기도를 한 뒤 완쾌되자 정종이 기뻐하여 도량을 크게 확장하고 사명도 국형사로 고쳤다고 한다. 이후 1680년에 폐사되었다가 1907년, 1945년, 1974년에 중수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수광전, 동악단, 범종각, 승당 드잉 있으며, 문화재로는 1799년에 세워진 진암당 대선사(晉庵堂大禪師) 부도(浮屠)가 있다.

⌖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고문골길 155 (행구동)
구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역사관광

구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

구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큰 역할을 한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으로, 원주 지역에서 맨 처음 건립된 은행이다. 조선식산은행은 1906년 6월부터 각 지방에서 설립된 6개 농공은행 권리와 의무를 계승한 은행으로서,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농업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본인의 직접적인 투자와 경영에 의존하는 대형 개발은행으로 설립했다. 1943년에는 한국인 행원 150명을 포함하여 498명의 행원을 채용했던 조선총독부 산하 최대의 정책금융기관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그러나 8·15 해방과 함께 일본으로부터의 자본도입이 소멸되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사채 소화도 불가능해 미국 대충자금의 일부만 취급하는 등 개발은행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 상업은행으로 변신하여 활동하다가 1954년 제정된 한국산업은행법에 의거해 개발은행인 한국산업은행으로 재출범했다. 외관은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며 창문을 위아래로 길게 반복 배치하여 수직성을 강조하였고, 외벽은 인조석 질감의 모르타르로 마감하는 등 일제강점기 은행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중앙로 88 (중앙동)
경천묘
한국관광공사 TourAPI 국문관광정보 서비스공공누리 제3유형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역사관광

경천묘

경천묘는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에 있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영정을 모신 묘우이다. 신라 말 927년에 경순왕은 왕위에 올랐으나 신라는 이미 사직을 본전할 힘이 미약한 상황이었으므로 935년(경순왕 9년) 이미 운명이 다한 신라의 형편을 신하들과 논의한 끝에 고려에 넘기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 후 경순왕은 두루 다니다가 이곳 용화산(현 미륵산)의 빼어남을 보고 그 정상에 올라 미륵불상을 조성하고, 그 아래에 학수사와 고자암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경순왕이 돌아가시자 왕을 추종하던 신하와 불자들이 고자암에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받든 것이 영정각의 시작이었다. 고려 중기 이후 전각은 무너지고 인적도 끊어졌다가 조선 초에 이색, 권근 등에 의해 전각이 다시 지어졌다. 숙종 때 원주목사 김필진이 새로 초상화를 그리고 전각을 지어 모셨으나 화재를 당했고, 영조 때 재건되면서 임금이 영정각의 명칭을 경천묘로 바꾸었다. 그 후 경천묘는 다시 불태워졌으나 경순왕이 머물렀던 유래에 따라 신라 문화를 지켜낸 왕의 충정을 기리고자 원주시가 2006년 9월 이곳 미륵산 아래에 경천묘를 복원하였다. 외곽의 진입문은 평삼문으로 되어 있고 사당 진입문은 솟을삼문으로 되어 있는데 당우는 조선후기 익공양식으로 되어 있다.

⌖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귀래면 미륵산길 200